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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병철 안

211121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 6:25-34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면서, “너희는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걱정거리 많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신 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염려라는 단어가 5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25,27,31,34절).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이토록 자주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는 염려할 만한 일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염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걱정거리들, 마음 쓰이는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바람 잘 날이 별로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무 염려할 일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염려와 걱정거리들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학업 문제, 진로 문제, 인간관계 문제, 취업 문제, 결혼 문제, 자녀 문제로 많은 고민을 안고 살아갑니다. 또 조금 살만하게 되었다 싶으면 건강 문제가 생기고 곧 노후가 닥쳐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걱정과 염려는 갈수록 더 강력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불안과 염려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말로 함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매우 실제적인 문제들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놓고도 염려하지 말고 살라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명령하셨습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염려 많은 세상에서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27절)고 하셨습니다.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습니까? 염려한다고 해서 진로 문제, 자녀 문제, 취업 문제, 결혼 문제, 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염려한다고 해서 우리의 생명을 하루라도 더 연장시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공중 나는 새를 보고(26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28절). 하나님께서 어떻게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지 자세히 보고 생각해보십시오. 새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26절). 하지만 새들은 잘 삽니다. 우리의 천부께서 길러주시기 때문입니다. 천부께서 공중 나는 새들을 기르신다면, 우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꽃들은 실이나 옷감을 짜지도 않으며 철마다 옷을 맞춰 입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염려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30절).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우리를 영육 간에 어떻게 먹이시고 입히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제까지 산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적이 있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같은 손길로 우리를 맡아주고 계시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지 않습니까?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는 다 이방인들이 하는 염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맡김으로써 모든 염려를 그칩시다. 걱정하지 맙시다. 불안해하지 맙시다.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어떻게 해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깁시다. 우리의 지나온 날들을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그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기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도록 하실 것이고 자타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실 것이고 후일에는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십시오. 주가 돌보십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만 우리가 이 염려 많은 세상에서 불안해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겼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절)고 하셨습니다.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통치를 찾고 바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고 무엇을 가졌다 하더라도 다 속고 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우리의 마음을 졸이고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우리의 힘을 기울여 이루려고 했던 모든 것들도 다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 세상도 그 형적도 다 지나갈 뿐입니다. 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의 줄입니다. 독을 삼켜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해독제입니다. 우리가 가장 우선해서 바라고 찾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단순히 정의롭게 살기를 추구하라는 도덕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의”는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의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의는 사람에게 속한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힘입지 않고서는 죄인된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제테오’는 “추구하라(seek), 찾으라(look for), 얻고자 하라(try to obtain), 간절히 바라라(seek for)”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살이에 대해 전혀 아무런 생각이나 고민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의를 찾고 바라고 우리가 받은 구원에 합당하게 살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발견했습니까? 만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간절히 바라십시오. 그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일로 많이 염려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는 많이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잘 구하지 않습니다. 자타의 구원에 얼마나 유익이 될지, 교회에 얼마나 덕을 세우고 유익을 끼칠 수 있을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살이에 따르는 모든 염려를 그칩시다. 불안해하지 말고 염려하지 맙시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일 염려는 내일이 하게 하십시오(34절). 우리의 모든 삶을 선하시고 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깁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며 삽시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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