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9-20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변론을 주고받을 때에 만일 어느 한쪽이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상대방의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일종의 논쟁을 벌이면서, 복음의 중요한 한 논지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9-18절)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논지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9절). 바울은 10-18절에서 이러한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구약의 대표적인 구절들을 증거로 채택합니다. 이 단락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구약성경을 가장 길게 인용한 단락입니다.
먼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0-12절). 이 구절은 시편 14:1-3과 53:1-4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인간의 죄의 증거가 제일 먼저 사람의 지성과 의지에서 발견됨을 말합니다. 인간의 악은 겉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과 가치관과 판단과 관점에 있어서 부패하고 치우쳐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들을 굽어 살피실 때에 지각이 있어 깨닫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인생들 중에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신의 죄와 비참을 스스로 깨닫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의지는 다 삐뚤어져 있고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죄악은 입으로도 잘 나타납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13-14절). 이 구절은 시편 5:9과 시편 140:3의 인용입니다. 유대인들은 “열린 무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동굴이나 묘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묘실의 입구가 열리면 거기에서는 온갖 악취와 모든 흉한 것들이 올라왔습니다. 사람의 입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혀로 사람을 속이며 그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악독와 불평과 비방과 온갖 누추한 말이 가득합니다(14절, 시 10:7 참조). 심지어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13절). 사람은 입술의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죄악은 행동으로 잘 나타납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15절). 이는 이사야 59:7-8과 잠언 1:16의 인용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죄 짓는 자리로 빠르게 움직여서 부지런히 죄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죄는 이 세상에서 버젓이 살아서 활보하고 있으며, 악인들은 처처에 횡행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습니다(갈 5:19-21). 그리하여 죄의 증거는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죄라는 개념 자체를 부인하려고 합니다. 만일 그들의 말이 옳다면 이 세상에는 죄가 정말 없어야 하겠지만, 세상은 죄로 넘칩니다.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궤변이요 인류 최악의 거짓말입니다. 나에게 죄가 있든지 죄가 없든지, 이 세상에 죄가 있든지 죄가 없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정말 죄가 전혀 없습니까? 이 세상에는 정말 죄가 전혀 없습니까? 죄의 엄연한 실체가 있고, 죄의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 죄악된 성향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의 결국은 파멸과 고생(비참)이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16-17절).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18절; 시 36:1 참조).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온갖 죄악을 저지르며 살면서도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시 73:11)고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선언은 단순히 성경의 공허한 선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적 현실이요 참 모습입니다. 성경이 사람을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증거하여 우리를 일깨워준 것입니다(시 143:2; 전 7:20; 렘 17:9; 요일 1:10).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줄을 모르고, 또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없다(19-20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우리의 모든 변명하는 입을 막기 위함입니다(19절). “율법 아래 있는 자들”, 곧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가졌지만,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죄인”이라는 선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ESV, NAS, RSV, 개역한글 성경에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기 때문입니다(20절). 유대인들은 온 세상의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이 율법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물론이요 모든 이방인들은 이 율법의 심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율법은 모든 인생들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어떤 인생도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완전함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20절).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율법이 있으니 자신들은 의로우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진단용이지 치료용이 아닙니다. 진단은 우리의 질병 여부를 확인시켜주고 치료의 필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있는 것이지, 질병 자체를 막거나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많이 알고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꺼내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사람 앞에서조차도 우리 자신이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깊이 후회되고 부끄러운 일들도 많고, 어리석고 경솔하게 행동했던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람 앞에서 이미 죄인입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의로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잘 알고 심지어 율법을 모두 암송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을 가지고 율법 앞에 한번 서보라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 앞에 선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고 하나님의 판단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여 “모든 입을 막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입을 막고 이렇게 부르짖으며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하더라도 율법을 가지고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겠습니다. 이 율법을 가지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정말 죄인인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살 길을 주십시오. 저에게 구원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행 2:3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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