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18-30
현재의 고난
우리는 신자의 성화의 삶에 대해서 매우 균형 잡힌, 현실적인,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18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씻음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의 “현재”는 아직 천국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장차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고 모든 죄와 죄의 영향으로부터, 모든 연약과 무지와 비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될 것이지만, 현재 우리는 아직 천국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의 성화의 현실과 환경은 안팎으로 매우 척박하고 곤고합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연약합니다. 우리의 지성은 연약하여 무지하며, 우리의 의지는 연약하여 선을 행하는 데 게으르며 자주 악을 허용합니다. 우리의 감정도 연약하여 기복이 심하고 또 부패합니다. 우리의 심령은 자주 낙심하여 하고 불안하여 합니다. 또한 우리의 몸도 연약하여 쉽게 지치고 쉽게 병들고 쉽게 상합니다. 우리는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사는 동안 경제적인 시련이나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당하곤 합니다. 많은 오해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학업, 취업, 결혼, 자녀 양육, 은퇴 후 노년 생활, 공허감과 외로움, 육신의 질병과 사별의 슬픔 등 계속되는 고난과 시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자의 성화의 여정은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환상적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의 탄식, 성도의 탄식, 성령의 탄식
그리하여 우리는 현재의 고난 속에서 탄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탄식이라는 말이 3번 나오는데(22,23,26절), 그 탄식의 주체는 각각 다릅니다. 먼저 “피조물의 탄식”이 있습니다(22절). 피조물은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고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에 탄식합니다(20-21절).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만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선하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창 3:17).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죽고 파괴되고 썩습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짐승들은 허무하고 비참하게 죽어갑니다. 기후문제나 환경문제로 인해 피조물들은 신음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물난리가, 다른 한쪽에서는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20절). 사실 피조물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고 아무 죄도 없습니다. 자기 뜻과 의지를 가지고 범죄한 것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들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저주를 받아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탄식”도 있습니다(23절).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들은 지금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화의 여정에서 많은 고난을 받으며 많은 시련을 받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고난과 시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눈물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모든 시련들을 통과할 때에 믿음을 지켜야 하고 죄와 싸워야 하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사탄의 공격과 세상의 유혹을 견뎌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롭게 되어 모든 면에서 고상하고 품격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탄식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탄식”입니다.
“성령님의 탄식”도 있습니다(26절). 성령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26절).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우리가 지금 얼마나 연약한 가운데에서 성화의 고단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탄식하십니다.
미래의 영광
하지만 신자의 삶에는 고난과 탄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현재의 고난이나 탄식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미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 영광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입니다(18절). 피조물들도 그 영광의 날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19절).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스러운 정체는 아직 그 전모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때가 올 것인데, 그 때는 이 세상의 끝날이며 피조 세계가 회복될 때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바로 그 영광의 날을 고대하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21절). 그 날에 이 탄식하는 만물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될 것입니다(계 21:1, 사 65:17, 벧후 3:12).
피조물은 그 영광의 날을 바라보면서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합니다(22절). 이 고통은 “해산의 고통”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 우주의 전 역사 기간 동안 그 영광스러운 순간, 곧 하나님의 아들들을 “해산하는” 영광의 날을 기다리며 탄식하고 진통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이 오면 만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함께 참여하면서 한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의 탄식 뒤에도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들도 속으로 탄식하면서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3절).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고 장차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지만(마 13:43), 아직 우리는 우리의 몸과 영혼의 완전한 구속과 영광스러운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여전히 연약하고 초라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죽을 몸을 가지고 있고, 몸의 구속은 부활의 날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그 찬란한 영광은 장래에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전모는 지금 우리 눈앞에 당장 보이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장래에 속해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소망 중에 바라며 기다려야 합니다(24절). 만일 우리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고 바라고 있는 것이 맞는다면, 그것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25절).
성령님의 탄식 뒤에도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우리가 마땅히 빌 바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때,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탄식의 끝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장래의 영광은 확실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친히 계획하시고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셨고 또 우리로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미리 정하셔서, 그리스도가 그의 맏아들이자 우리의 맏형이 되게 하셨습니다(29절, 히 2:11).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셨고 우리를 미리 택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미리 정하신 자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30절). 이것이 신자들의 영광이요 신자의 성화의 궁극적 종착점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 속에서 장래의 영광을 바라봅시다. 지금 우리는 현재의 고난과 삼중의 탄식 가운데 있으나, 참음으로 견디고 기다립시다(25절). 이성 없는 피조물들도 영광의 날을 고대하며 소망 중에 인내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더욱 그 영광의 날을 바라며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고후 4:17)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 날이 우리에게 임할 것을 확신하면서 소망 중에 성화의 싸움을 잘 싸웁시다(요일 3:2, 고후 5:2, 빌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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