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9-33
집집마다 살림을 하려면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경영해 나가실 때에 그릇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돌, 나무, 꽃, 동물, 해와 달과 별들이 다 하나님의 그릇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그릇은 사람 그릇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빚으신 가장 고귀한 그릇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자주 “그릇”에 비유합니다(사 45:9, 64:8; 고후 4:7, 딤후 2:20-21). 오늘 본문도 사람을 그릇으로,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해서 말씀했습니다.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19-21절)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전반부에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이 모든 일이 원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원하시는 자를 강퍅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따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8절).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선언이 많은 사람들에게 반론을 일으킬 것을 예상하였습니다. 예상되는 반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19절).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에 따라서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정죄하시고 책망하시는 것은 모순되는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완악하게 된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시고 정죄하시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반론에 대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20절).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오, 사람아! 너는 누구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께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고 항의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에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항의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21절), 하나님도 천한 그릇과 귀한 그릇을 만드실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고 우리는 그가 만드신 그릇입니다. 지음 받은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처사에 대해 항의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22-23절)
하나님의 주권은 그의 손에 들린 “두 그릇”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노와 그 진노의 능력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진노의 그릇”을 준비하시고 그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긍휼의 그릇”을 준비하십니다(22-23절).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을 준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억지로 강퍅하게 하셔서 죄인이 되게 하시고 멸망 받게 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자의로 하나님께 범죄하여 죄인이 되었고 멸망 아래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인을 선택하지 않고 그들의 죄악 가운데 그대로 남겨두신 것은 엄위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죄인들을 전부 구원하셔야 할 어떤 책임이나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그 어떤 빚도 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의 하나님이시기에 인생들이 모두 다 멸망 받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들 중에 어떤 이들을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따른 것이고 하나님의 전적 은혜와 자유로운 주권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다 선택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들의 죄악 가운데 남겨두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엄위하신 주권에 속한 문제이며, 또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따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긍휼의 그릇으로 부르심(24-29절)
이제 바울은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24-29절). 긍휼의 그릇은 바로 믿는 “우리”를 가리킵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24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긍휼의 그릇으로 부르셨다고 말하면서(24절), 먼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긍휼의 그릇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논증하기 위하여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름을 얻으리라”(25-26절). 바울이 인용한 이 말씀은 본래 선지자 호세아의 자녀들을 향해서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통해서 낳은 자녀들은 처음에는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이름과 ‘로암미(내 백성이 아님)’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호 1:6,9). 하지만 그들은 다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호 1:10, 2:23).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을 순전히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셔서 로루하마와 로암미였던 이방인들이 루하마와 암미로 불리게 될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긍휼에 그릇에는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사야 10:22-23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27-28절)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더라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의 주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반드시, 신속하게 끝내실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이사야 1:9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29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남겨두셨기” 때문에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30-33절)
바울은 의를 따르지(추구하지) 않았던 이방인은 의를 얻었고 오히려 의의 법을 따랐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율법을 통해서 얻으려고 했던 의)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였습니다(30-31절).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32절). 그래서 부딪힐 돌에 부딪힌 것입니다. 이사야가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33절) 하고 예언했던 그대로입니다(사 28:16, 8:14-15; 합 2:4 참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지고 복음에 부딪히는 것은, 사람들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32절). 반석이신 그리스도에 걸려 넘어지고 부딪히면 깨어지게 될 것입니다(벧전 2:6-8). 하지만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34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시다. “오, 사람아. 너는 누구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인 것을 겸손히 인정합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고 우리는 그릇입니다.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의 그릇으로 삼으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진노 아래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신 은혜에 감사하며 모든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온에 두신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믿읍시다. 오직 그를 믿는 자들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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