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13-24
성경은 하나님을 나무를 심고 가꾸시는 농부로, 그리고 인생들을 가리켜서 나무로 자주 비유합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불렸으며(시 1:2-3; 렘 17:7-8), 이스라엘은 “극상품 포도나무”로 불렸습니다(사 5:7).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라고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하면서 인생을 감람나무로 비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입니다. 바울 당시의 형편만을 보면 하나님은 유대인을 완전히 버리시고 포기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여 그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였습니다(롬 11:11-12).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기초해 있는 이러한 역사관이 없이는 교회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전망할 수도 없습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3-16절)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큰 그림을 말한 후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13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의 사도로 보내셔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써 유대인들로 시기 나게 하셔서 결국 유대인들을 구원 받는 자리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알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었습니다(14절).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한 것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지고 왔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받아들으시면(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죽은 것과 같이 보이는 이스라엘에게 생명과 회복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5절).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다”(16절)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수 때의 첫 열매를 제일 먼저 하나님께 거제로 드리도록 하신 명령을 상기시킵니다(민 15:17-21).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처음 익은 열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거룩하게 하셨을 때에 “떡덩이”인 그 모든 후손들, 곧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언약을 맺으셨기에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하니라”(16절)고 하셨습니다. 뿌리 역시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거룩하게 하셨으니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인 이스라엘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진 돌감람나무(17-22절)
하지만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17절).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의 가지들은 꺾여 있었고,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서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받고 있었습니다(17절). 참감람나무는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의 가지들을 꺾으시고 이방인들의 가지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주신 것입니까?
“접붙임(접목법, grafting)”은 원예법의 일종입니다. 접목을 하는 이유는 품종이 좋은 나무 가지를 잘라서 생명력이 좋은 나무에 접목하여 그 가지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더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원예법에 따르면 돌감람나무 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 좋은 열매를 맺는 돌감람나무 가지를 굳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돌감람나무는 가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잘라서 불태워서 땔감으로나 쓰는 것이 어울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치 없는 나무인 돌감람나무와도 같은 우리를 참감람나무, 곧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시켜 주시고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주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주셨습니다. 나쁜 나무를 좋은 나무에 접붙여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악된 본성까지도 바꾸어주셔서 돌감람나무였던 우리를 참감람나무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원예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18절). 그들이 우쭐거리거나 교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가지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보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8절). 그러므로 가지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돌감람나무 가지를 참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여주신 하나님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원)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19절)고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잘려진 것은 바로 그 자리가 나를 위한 당연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이다”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옳다. 유대인들이 꺾이고 그 자리에 너희 이방인들이 접붙여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꺾인 것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그들에게는 믿음이 허락되지 않았고 너희 이방인들에게는 믿음이 은혜로 주어져서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너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 오히려 너희는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다면 접붙여진 가지도 아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0-21절). 이 말씀은 우리의 구원이 개인적 차원에서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어떤 선한 것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아니면 이방인들도 언제든지 대대적으로 복음에서 떠나고 참감람나무에서 꺾일 수 있으니, 유대인들을 향해서 자긍하지도 말고 높은 마음을 품지도 말라는 경고입니다(18,20절).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22-24절)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대한 권면을 마치면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22절)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거부한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진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으면 꺾이고 말 것입니다(22절). 반면에, 지금 이스라엘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꺾여 있지만, 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면 다시 접붙임을 받을 것입니다. 접붙이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23절). 이방인들이 원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다고 한다면 원가지인 이스라엘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24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다시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면 그들은 언제든지 원래의 참감람나무에 다시 접붙여질 것입니다.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도 접붙여주셨는데 이스라엘을 접붙이지 못하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고 하는 위대한 역사관의 렌즈로 교회와 세상의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위대한 역사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어 힘써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돌감람나무, 아니 마른 막대기와 같은 우리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주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뿌리로부터 오는 진액과 양분을 잘 공급 받아서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힘써 맺읍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10)인 줄 알고, 자긍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위대한 농부이자 자비로운 원예사이신 하나님께 모든 찬송과 영광을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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