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33-36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에 대해 진술하는 로마서 9-11장을 마무리하는 한편의 찬송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서 복음에 대해 진술하다가 잠시 멈추어 이렇게 찬송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엡 3:20-21; 딤전 1:17). 사도 바울은 서신서의 중간에서 찬송을 하기도 하고, 서신서의 시작이나 끝에 이런 찬송을 하기도 합니다(갈 1:4-5, 엡 1:3-14, 계 1:6, 롬 16:27, 딤전 6:15-16, 딤후 4:18). 특별히 이런 성격의 찬송을 “송영(頌榮, doxology)”이라고 부릅니다. “송영”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며 찬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송영에는 공통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그에게)”라는 말과, “영원히(세세에, 영원무궁히)”라는 말과,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송영은 영어로 “독솔로지(Doxology)”인데, 이 말은 라틴어 “독솔로기아(doxologia)”에서 왔고, “독솔로기아”는 헬라어로 “영광”을 의미하는 “독사(δόξα)”와 “말씀”을 의미하는 “로고스(λόγος)”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는 “영광의 말씀” 정도가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33절)
로마서의 이 송영은 감탄문과 의문문과 평서문(서술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이 송영은 2개의 감탄문으로 시작됩니다. 첫 번째 감탄문은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은 참으로 깊도다!”(33a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두시고, 역사 가운데에서 그 둘을 차례대로 불러 구원하셔서 마침내 택하신 자들 모두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감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감탄문은 “그의 판단은 측량하지 못할 것이며(헤아릴 수 없으며, unsearchable) 그의 길은 찾지 못하리로다(불가해하도다, unfathomable)!”(33b절)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판단과 결정, 하나님의 모든 작정과 계획, 하나님이 일을 행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사 55:9).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하여 증거하다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감탄문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과 공의와 지혜와 권능과 거룩과 영원하심과 무한하심 등 끝없이 열거할 수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곧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잘 나타납니다. 우선,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과 기묘함을 볼 때에, 그리고 지으신 만물을 보존하시고 세밀하게 돌보시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감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온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셨는지를 볼 때에 감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이루고 계심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솜씨와 신실하심에 감탄하며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수많은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주신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로 하여금 우리 대신 죽임을 당하게 하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참으로 놀라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증거하다가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34-35절)
이 송영은 3개의 의문문으로 이어집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34-35절). 이 세 질문은 33절의 찬송에 대한 화답의 성격으로, 33절이 독창이었다면 34-35절은 중창입니다. 중창자들은 두 개의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세 개의 의문문으로 화답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송영을 위해서 이사야 40:13과 욥기 41:11을 인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34절에서 두 개의 질문을 던졌는데, 이는 이사야 40:13의 인용입니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측량)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고전 2:16)?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 아는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지 않은 부분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주의 모사가 될 수 있겠느냐? 누가 감히 하나님께 조언하고 충고할 수 있겠느냐?” 하고 반문함으로써 감탄문에 화답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의문문은 35절로, 이는 욥기 41:11의 인용입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1)고 하셨습니다(시 24:1; 고전 10:26 참조).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고전 4:7)? 우리 중에서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이것을 하나님께 먼저 드릴 테니 나중에 제게 갚으십시오.” 하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완전한 주인되심 혹은 주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송영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6절)
이 송영의 마지막은 웅장한 합창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진술하는 평서문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6절).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왔습니다. 창조와 구원이 다 주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만물은 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붙드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지 않으시면 어떤 것도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물이 주께 돌아갈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는 말로 이 송영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겸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의 중심에 우리 자신을 두는 일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나”를 위하여 있고 “나”로 말미암아야 하고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높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야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하고 복된 일은 먼저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일이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하고 복된 일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입니다.
이 송영을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우리를 위하여 크고 기이한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께 이 독창과 중창과 합창의 송영으로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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