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2:14-21
신자에게는 아름다운 자태, 신자다운 거룩한 자태가 있어야 합니다. 신자의 신자다움은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둘로 요약됩니다. 참 신자들에게는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입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중요합니다. 육신적으로 편안해지고 잘살게 될수록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기 쉽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해지면 이웃과의 관계도 약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으면 이웃에 대한 사랑도 식게 됩니다.
로마서 12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얼마나 놀라운 구원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롬 1-11장) 성도가 이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 큰 원칙을 교훈하는 장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12장은 우리가 이웃을 대할 때, 신자들에 대해서(9-13절) 그리고 불신자들에 대해서(14-21절)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함으로써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야 하는지 그 큰 원칙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14절)
첫째,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절)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웃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마음, 곧 중심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고전 6:10 참조),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악을 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신자들을 대하고 악을 당할 때에 그들을 축복하며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잘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복과 성공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기를 바라는 중심의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주후 57년), 당시 황제는 네로(주후 54-68년)였습니다. 네로는 매우 권력 지향적인 사람으로, 그는 자신의 왕권을 약화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데 능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기독교회를 처음으로 노골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 로마 황제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네로의 통치 아래 있던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우리의 사랑의 대상자이고 전도의 대상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조롱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여 영적으로 암매하고 무감각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의 핍박자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조롱하고 교회를 증오하고 성도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들을 축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15-16절)
둘째,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15-16절)고 하셨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공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다운 마음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함께 슬퍼할 줄 아는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인들에게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게 해주신 불신자 이웃들의 삶의 형편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마음을 나누고 정을 나누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자들이고 전도의 대상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16절)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을 대할 때에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여 영적,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기 쉽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무언가 대단히 훌륭해서 신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며 불신자 이웃들을 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아야 합니다(잠 26:12). 예수님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와 함께 마음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요 11:35).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위대합니까? 그렇지도 않으면서 영적,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서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고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7-21절)
셋째,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절)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악을 당하게 될 때에,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행동의 큰 원칙입니다. 신자의 자태는 마음의 태도와 마음의 행동뿐만 아니라 실제 삶의 행동으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악을 행했다고 해서 우리가 상대방에게 두 배나 더 못되게 하고 악을 행해도 된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18절)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이웃들은 사랑의 대상자이자 전도의 대상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과 평화해야 합니다.
또한 복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수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복수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19절)고 하셨습니다(신 32:35 참조).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일일이 복수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가해지는 모든 악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원수를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갚는 삶을 살고자 하면 우리는 일평생 복수만 하다가 죽어도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런 삶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우리를 매우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복수하는 대신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절)고 하셨습니다(잠 25:21-22의 인용). 숯불을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오히려 선을 행함으로써 상대방의 얼굴을 뜨겁게, 부끄럽게 만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21절). 우리는 왜 이렇게 바보같이 악을 당해도 선을 행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에게 악을 행하신 적이 없고 언제나 우리를 선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21절). 이것이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입니다.
불신 이웃들을 대할 때에 그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축복하고,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며 기도합시다.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눕시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과 평화하면서 선을 행합시다. 이것이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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