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1-7
시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이자 찬송의 모범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성도들로 하여금 여러 다양한 신앙 경험들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때로 기뻐하고 때로 슬퍼하며 때로 감사하고 때로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고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러한 고백과 기도와 찬양이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시로 기록되게 하셔서, 만세만대의 성도들이 시편을 자신의 고백과 기도와 찬양으로 삼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의 저자들은 성도들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게 되는 다양한 상황들 속에 시편을 잘 적용해서 각각의 상황에 적실한 시편을 가지고 그것을 우리의 고백과 기도와 찬송으로 삼아야 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1-2절)
시편 11편은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피하였다”고 말한 것을 보아, 지금 다윗에게 다급하고 위험한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그 때에 다윗은 성도로서 당연히 하나님께 피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윗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에게 “너희는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신자는 문제가 생기고 위기에 처할 때에 하나님께 피합니다. 신자는 큰 위기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실제로 어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 세상의 논리와 힘을 의지하고 그것을 피난처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보다 그것이 더 안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악인들은 힘없는 새와 같은 다윗을 겨냥하여 화살을 시위에 먹이고 활을 당기고 있었습니다(2절, 삼상 26:20 참조). 악인들은 마음이 바른 자, 곧 성도들을 어두운 데서 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2절). 그래서 사람들은 다윗에게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경험은 모든 성도들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때에 여러 문제와 위기를 만납니다. 신자는 위기를 만날 때, 비록 믿음이 연약하지만, 어떻게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을 지키면서 그 위기를 이겨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우리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충고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다 부질없는 일이다. 지금은 비상 상황이니 하나님이니 믿음이니 기도니 은혜를 말하는 것은 너무 한가하고 비현실적이다. 지금은 세상의 방법과 논리를 따라야 할 때이다.”라고 조언합니다. 이런 말들이 다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1절)는 말입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3절)
이에 대해 다윗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3절). 많은 주석가들이나 성경번역본들은 3절을 다윗의 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조언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의 해석을 따른다면, 3절은 “네가 아무리 의인이라도, 네 삶의 기반(건강, 경제, 권력, 명예 등)이 무너지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지금은 하나님의 방법 말고 다른 수단을 강구하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3절을 다윗의 대답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3절이 다윗의 대답이라면, 그 뜻은 이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이다. 그러니 내가 나의 존재의 터와 기초가 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방법에서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떠나서 내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룬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의인”이란 다름 아닌 “참된 성도, 신자”를 의미합니다. 참된 성도의 터와 기초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터전이시며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되십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고 바른 신앙고백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방법을 저버리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터와 기초를 허물어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떠나서 아무리 우리가 스스로의 안전과 진보와 성장과 만족을 꾀한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릴 때, 그것은 신자의 터가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고, 우리의 존재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사냥꾼이 매복해 있고 사냥꾼들이 우리를 겨누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이는 것과 같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새처럼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산들은 다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여호와께 피하여야 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3절).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4-7절)
또한 다윗은 “새처럼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여호와께서 그의 성전에 계시며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4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다윗 시대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는데, 다윗이 어떻게 여호와께서 그의 성전에 계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까? “전”은 “왕궁(히, 헤이칼)”을 의미하고, 여기에 “거룩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면 “성전(거룩한 왕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막을 가리켜서도 여호와의 “전”이라고 자주 불렀습니다(삼상 1:9, 3:3 참조).
하나님은 지금도 그의 성전에 임재하여 계시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뭇 인생들을 감찰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입니다(4절).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인들은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시 10:13).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삶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의 보좌에서 변함없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위험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누가 의인인지 누가 악인인지를 감찰하십니다(5절).
하나님은 단순히 감찰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강포함을 좋아하는 악인들을 미워하시고,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는 분입니다(6절). 새들이 사냥꾼의 올무와 그물에 잡혀서 멸망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악인은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을 그들의 분깃으로 받을 것입니다(6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은 넘치는 죄악으로 인해 심판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의인들을 좋아하시고 의로운 일을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7절; 시 45:7 참조). 그리하여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7절). 정직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밝히 보고,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과 사랑과 구원을 더욱 잘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마 5:8 참조).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일이 다급해지면 하나님의 방법을 저버리고 자기 수단, 세상 논리를 따라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위험을 만나고 다급한 일을 당할 때, 바로 그런 때야말로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피해야 할 때입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요 15:5)? 그러므로 하나님께 피합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의인과 악인을 감찰하시며, 악인을 미워하시고 의인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