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시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아야만 예수님을 바로 믿고 섬길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한 뒤에(1절), 이어서 예수님을 사람이시라고 증거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절).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육신(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예수님,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고 하셨습니다(요이 1:7 참조).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냥 탁월하고 위대한 한 위인에 불과한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신(became)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고, 사람으로 나셨고, 여자의 후손으로 나셨고, 아브라함의 씨로 나셨고,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습니다.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악하고 곤고한 세상 한복판을 그의 거처로 삼으시고, 우리의 누추하고 가난한 환경에 참여하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바로 이 일,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일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방식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방식은, 하나님이기를 멈추시고 (신성을 버리고)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빌 2:6-11). 그래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실 때에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 이 두 본성이 그리스도의 한 위격(인격) 안에서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성육신하기 이전에 그리스도는 성자(독생자) 하나님으로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 여자에게서 나실 때에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우리와 모든 면에서 같은 인성을 취하셨지만, 다만 죄는 없으셨습니다.
어떻게 신성과 인성의 이 두 본성이 섞이거나 변하거나 나뉘거나 갈리지도 않으면서도 그 두 본성이 한 위격 혹은 한 인격 안에서 연합하여 계시는지, 이것은 신비한 일이요 우리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일입니다. 그래서 멜랑히톤은 “신성의 신비를 탐구하는 것보다는 사모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신성과 인성 둘 다를 취하신 상태로 존재하신다는 이 사실이 우리는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본 사람들은 거기에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본다”는 헬라어 동사 “데아오마이”는 아무 생각 없이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가 아니라, 어떤 목적 또는 생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단지 육신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보는 것, 감각적인 차원에서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본질을 꿰뚫어 지각하고 인지하는 것, 간파하는 것(perceive)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지각하고 간파하고 인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구세주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수, 곧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하지 못한 일,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분이기에 그는 영광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은혜”란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그리스도 안에 다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사랑도 있고 생명도 있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도 있고 풍성한 구속도 있고 평강도 있고 희락도 있고 안식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좋은 것이 다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에게는 진리가 충만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소위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충만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일, 이 성육신의 참됨을 부인했던 많은 이단들이 있어왔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실제로 육신이 되신 것이 아니라고 했던 소위 가현설 이단은,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원론 사상을 가지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육신을 취하실 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궤변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참 사람이 아니셨다면, 예수님의 모든 순종,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눈가림, 눈속임에 불과하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 지은 인간이 죗값 치르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의 중보자와 구원자는 반드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6문답). 만일 예수님이 참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죗값은 그 어디에서도 치러진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아닌데 그런 것처럼 잠깐 보이게 하셔서 그것을 믿게 하신 것이 됩니다. 복음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 예수님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할 때, 복음은 말장난이 되고 맙니다.
또한 성육신과 관련된 또 다른 이단은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olinarianism)입니다. 이들이 주장했던 것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은 맞지만,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을 취하실 때에 인간의 영혼과 지성은 취하지 않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신성이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의 육체만을 취하셨다는 주장입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이 맞다면 그리스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몸만 빌려서 사람 행세를 하신 것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지만 다만 죄가 없으신 분이시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육체(요일 4:2; 골 2:9)와 지각 있는 영혼(소요리문답 22문답)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인간의 육이 공존하시니 완전한 사람이십니다.”(아타나시우스 신경).
여러분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까?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신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더욱 더 밝히 보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위엄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우심과 그 영광을 날마다 더욱 밝히 보며, 그분 안에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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