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작성자 사진병철 안

2408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최종 수정일: 8월 24일

요 1:1-3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믿는 바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바르게 믿고 예수님을 잘 증거할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많은 호칭들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호칭들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지를 가르치신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요 6:35), “세상의 빛”(요 8:12, 9:5), “양의문”(요 10:7), “선한 목자”(요 10:11,14), “부활이요 생명”(요 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 “참 포도나무”(요 15:1)라고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기독론적 호칭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칭은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른 것입니까? “말(言)”이란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같은 것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쓰는 음성 기호 또는 목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내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소리”나 “글”이라는 말입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신 것입니까?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헬라 철학과 연결시킵니다. 헬라 철학에서 “로고스”라는 단어는 “이성, 정의, 우주가 존재하게 된 이성의 원리” 등의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그런 의미를 여기에서 차용하면서,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어떤 우주 원리가 예수님에게 있다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변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별로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은 잠언 8장에 나오는 의인화된 지혜의 실체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가능한 해석이고 좋은 해석이지만 “말씀”이라는 호칭에는 이보다 훨씬 더 풍성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말씀이라고 불렸습니까?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멜랑히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불리신 이유는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공포자요 해석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이란 말하는 이의 생각과 뜻과 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가장 분명하게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히 1:1-2a).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의 그 어떤 말씀보다 가장 확실한 말씀(로고스)입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가장 주된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의 언어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의 뜻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 내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끊임없이 알려주시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과, 그 구원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일들을 성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핵심은 결국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기록되어 있습니다(요 5:39). 예수님은 계시의 중심이자 절정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의 모든 약속들이 가리키고 있는 인물이요 구약의 모든 예언들의 성취와 실체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공생애 기간 동안 끊임없이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것은 다른 이들의 가르치는 것과 달리 너무나도 탁월하고 힘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마 7:28, 막 1:22, 6:2, 눅 4:32).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던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은 예수님에게 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예수님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있었습니다(요 6:68). 그러므로 “말씀”은 예수님의 별칭으로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호칭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은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해 중요한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그 말씀이 “태초에” 계셨다는 것입니다(1절). 예수님은 태초에 계셨던 분, 곧 영원부터 계시는 분입니다. 태초란 “시작(beginning)”, 곧 “만물이 있기 전”, “시간이 시작되던 때”를 말합니다.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계속해서 존재하고 계셨으니, 곧 영원에서부터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만물보다 먼저”(골 1:17) 계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사람이기만 하신 분이 아니라 그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하신 것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증거합니다(빌 2:6; 요 20:28; 롬 9:5). 예수님의 가르침이 탁월하고 권세가 있었던 것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통달하여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요 17:5)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친밀하면서도 성부 하나님과 위격적 구별(구분)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시는 영원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성부 하나님과 구별을 가지는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1절의 선언이 실수가 아니라 자신이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2-3절에서 거듭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2-3절).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태초에, 아버지와 위격적인 구별을 가지고 성부 하나님과 함께(마주하여) 계셨던 분이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구원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인 것처럼, 창조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창조의 일을 하신 삼위일체의 제2위 하나님이심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3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 가운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부인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했던 수많은 이단들이 그 이름과 형태를 달리해서 많이 일어났습니다(아리우스주의, 여호와의 증인, 양태론, 신천지 등등). 그들은 모두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으며,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러한 모든 이단을 배격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만 바로 알아도 많은 이단들에게 허무하게 속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창세기 1장 1절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두 구절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두 위대한 토대가 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고 바로 믿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조회수 12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Opmerkingen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