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1-20
오늘 본문에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한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 여인의 이름은 한나입니다. 한나는 엘가나의 두 아내 중 하나였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그녀의 이름의 뜻과는 달리,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막상 현실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많았습니다. 브닌나라는 이름은 ‘열매가 무성한 가지’라는 뜻인데, 그 이름 그대로 그녀에게는 자녀가 많았습니다. 엘가나가 한나를 특별히 사랑했지만, 브닌나는 그로 인해 질투하여 한나를 더욱 괴롭혔습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심히 격동시켜 괴롭게 하였고, 그래서 성경은 브닌나를 ‘적수(대적)’라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열매가 없고, 은혜와 상관없는 자에게는 풍성한 열매가 넘쳤습니다. 우리도 때로 살아가면서 이러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서 결핍과 갈등이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새 생명을 창조하시기 위함
첫 번째 이유는 “새 생명을 창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한나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불임의 상황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과 닮아 있었습니다. 한나가 살던 시대는 사사 시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으나 그들은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시며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사사를 보내 이방 민족의 공격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점점 영적으로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 제사장이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에 앉아 있는 모습은 영적으로 불임 상태와도 같았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한 여인의 울부짖음을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해산의 고통으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영적으로 메말라 버린, 앙상한 가지만 남은 죽은 나무와 같은 영적 불임 상태에 있는 이 시대를 향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사용하셔서, 주님께 가슴을 치며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는 새 창조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어가고 생명력이 끊어진 한 공동체를 살리고, 새 생명, 새 창조, 새 시작을 주시기 위해 한 사람을 통해 울부짖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답답하고 기가 막힌 고통의 시간은 단순히 불행이나 불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 창조와 새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위대한 계획의 일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절망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해산의 고통, 억울한 시간, 답답한 가슴을 치며 부르짖는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가정 안에, 교회 공동체와 민족 안에 구원의 일을 행하시기 위한 도구임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 이러한 시간을 주십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웠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통곡했습니다(10절). 이 상황에서 한나는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하지 않았고, 자신을 괴롭히는 브닌나에게 가서 마음을 쏟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남편에게 가서 화를 내거나 분풀이를 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나는 여호와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마음을 쏟았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었으며,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입술만 움직이며 탄식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세 번이나 칭하면서, 자신이 철저히 낮고 비천한 존재임을 고백했습니다. 한나의 태를 막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5-6절). 한나도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 태를 막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한나는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태를 막으신 분이라면, 그 태를 여실 수도 있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고난과 답답한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한나가 자신의 노력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면, 그 은혜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시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찌할 바를 모르는 고난과 시험의 시간을 주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사무엘을 주시기 위함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사무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했을 때, 한나는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자, 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시고 임신하게 하셨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사무엘이라는 이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사무엘’에서 ‘엘’은 신, 즉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의 어원에는 “셰마”라는 단어도 포함됩니다. 신명기 6장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하셨을 때 “들으라”는 말이 바로 “셰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의미로, 한나는 자신의 아들을 사무엘이라 이름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임이었던 한나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셨고, 그녀가 구한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27절). 여기에는 한나도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자 첫 제사장이며 선지자로 사역을 시작했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여인의 울부짖음을 통해 영적 불임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재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겪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의 모든 기도에 대한 궁극적인 응답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한 구원을 주시는 약속된 사무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모든 고통과 고난에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우심과, 그분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의 총체적인 축복을 온전히 경험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하는 그 기도의 응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의 풍요입니까? 건강입니까? 자녀의 축복입니까? 그러나 고난을 겪고 나면, 우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사무엘, 곧 그리스도였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공동체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 이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온 교회 공동체와 함께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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