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갈릴리는 북쪽에 있었고 여리고는 동쪽에 있었으므로 사실 예수님은 여리고를 통과하지 않고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여리고를 지나 가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여리고 성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나시기 위한 것이었어요.
예수님께서 만나려 하셨던 한 사람은 누가복음 18장 35-43절에 등장하는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앞을 보지 못하는 그 소경을 만나 고쳐주셨습니다. 또 이 소경과 함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 역시 예수님께서 찾아주셨던 한 사람입니다. 2절을 보면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뜻이 있는데, 그것은 ‘흠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세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어떤 직업을 말하는 것입니까? 세리는 세금을 받는 관리를 말합니다. 세금은 국민들이 자기 소득의 일부를 국가에 의무적으로 내는 돈을 말합니다. 문제는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그들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리들은 유대인이면서도 로마 정부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는 권한을 사들여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세리는 정한 세금 이상의 것을 거두어 일부는 내고, 일부는 자식이 착복하는 일들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부정한 이방인들의 앞잡이가 되어서 동족의 고혈을 짜내는 세리들을 상종하지 못할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삭개오 자신도 자신에 대해 자포자기 한 상태로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보여줍니다. 3절입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 가로 나가 예수님을 보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했습니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는 것입니다. 만약 삭개오가 도시에서 존경받던 관원이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위해 기꺼이 길을 내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죄인이라고 멸시받던 세리장입니다. 아무도 그를 위해 길을 터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게 될 길 가에 있던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보통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은 누구입니까? 어린 아이들입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부유한 사람이 나무 위를 올라가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삭개오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그런 것들보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분인지 정말로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지가 넓게 뻗어 있고 잎이 무성한 돌무화과나무, 그래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기에도 좋고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숨기기에도 좋은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뽕나무 곁에 이르시자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우러러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뽕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셨을까요? 어떤 연구자는 나무 위에 올라간 세리장 삭개오를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의 이름을 아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중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삭개오를 비난하고 욕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말을 듣고 삭개오를 아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오래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목자가 자기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알고 불러주는 것처럼, 예수님도 삭개오를 아셨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뒤이어 하신 말씀은 더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하루를 묵고 가시겠다고 하신 점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보통은 집 주인이 나그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손님이 자신을 환영할 주인을 선택하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주인처럼 말씀하셨고, 삭개오는 종처럼 반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처럼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고 그와 함께 유하겠다고 말씀하셨으며, 삭개오는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사실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삭개오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삭개오를 비난하고 욕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삭개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삭개오도 예수님께서 자신과 같은 자를 상대해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고, 만약 자신을 만나주신다면 분명 자신을 크게 꾸짖으시고 책망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삭개오가 삭개오 자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또는 사람들이 삭개오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멸시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이름을 친근히 불러주셨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교제하고 싶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 곁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불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삭개오가 있는 나무 아래로 가셔서 그를 부르셨을 때, 내심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삭개오를 꾸짖으시고 혼쭐을 내주시려나 기대했을 것입니다. ‘삭개오 이놈아, 너는 로마의 앞장이가 되어 네 동족, 하나님의 백성들을 착취하고 고혈을 짜내다니, 어서 속히 회개하고 율법을 지켜라.’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이 통쾌하게 한 말씀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유하러 들어가시는 모습을 보고 수군거렸습니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를 향하고 있던 사람들의 수군거림, 비난과 원망이 다 예수님께로 항하였습니다. ‘선지자라는 사람이 삭개오가 어떤 죄인인지 알지 못하는가? 저런 부정한 자와 함께 하면 그 자신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저자는 죄인의 친구인가?’라는 소리가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도 분명 이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자신의 집에 들어와 유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자신을 향하던 뭇사람들의 정죄와 비난과 원망이 예수님께로 향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사실들을 아셨을까요? 물론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삭개오를 위해 그런 것들을 기꺼이 감내하고자 하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가 되어 그의 죄를 인정하거나 그와 함께 죄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잃어버렸던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비난을 기꺼이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을 부르시고 자신의 집에 유하려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습니다(6절).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신과 같은 죄인을 불러주시고 자신의 집에 유하기를 원하시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기뻤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님의 사랑이 삭개오를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자리에서 삭개오는 일어났습니다. 삭개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것은 공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요? 8절을 읽어봅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것을 강제로 빼앗거나 잃어버리면 자신이 물어내는 물건 값의 오분의 일에 해당하는 값을 보태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습니다(레 6:5, 민 5:7). 하지만 삭개오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기꺼이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가 앞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와 구주로 믿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삭개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길을 나셨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의 소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여 살고자 하는 나사로 역시 구원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10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신 것은 처음부터 삭개오를 찾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으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먼 발치에서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외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듯,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대하셔도 자신은 아무 말 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삭개오를 예수님은 찾아주셨습니다. 비록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어서 예수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고 예수님은 고개를 드셔야 했지만, 그가 있는 곳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그 앞에 멈추어 서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우러러 보시며,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그리고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때 성령께서 삭개오의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삭개오는 큰 기쁨으로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기꺼이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회개의 삶을 살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재산 중 부당한 방법으로 모은 것들이 많다고 인정하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어놓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소유를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의 주인되심을 고백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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