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길 기도합시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본문을 읽고 난 후 아래 해설을 읽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
앞서 신명기 17장에서는 사회적 지도자 두 사람, 곧 재판장과 왕에 관하여 말했습니다. 18장은 영적 지도자 인 제사장과 선지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1-8절은 레위인 제사장과 레위인에 관한 규례입니다. 레위지파는 다른 지파와 달리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영토에 유다, 에브라임, 베냐민이란 이름의 지역은 있지만 레위라고 불리는 땅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지파에게 기업을 주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땅보다 더 좋은 것을 주셨지요. 바로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셨습니다”(2절).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전체 지파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제물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주어질 몫을 받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모든 지파 중에서 레위지파를 택하여 내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열방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내셨다는 표현과 같지요(7:6 참조). 즉 하나님께서 열방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여 내신 것처럼 이스라엘 가운데서 레위지파를 택하여 내셨습니다. 레위지파의 기업은 실제로 이스라엘 전체에 의해서 주어지는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더 풍성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시고 공급하신 것처럼 레위지파에게 베풀고 공급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를 이스라엘 중에서 택하여 내신 이유는 그의 후손들로 “영영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려”(5절)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성소에서 제사를 통해, 레위인들은 성소에서 제사장을 도울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서 율법을 보존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레위지파는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오직 이 일에만 전념하도록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레위지파가 맡겨진 직무를 신실하게 행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성실하게 의무를 다하여 레위지파의 기업을 책임질 때,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풍성하고 복된 삶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제사장직은 목회자와 같은 사역자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는 동일하게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위지파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가르치는 일에 전무하는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필요를 공급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신약에서도 강하게 적용됩니다(갈 6:6).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더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9-22절은 선지자에 관한 규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직분자들에 언급되는 순서의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판장과 왕, 제사장과 선지자의 순서로 언급되는데요.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세상과 구별되는 공평과 정의가 유지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통치가 시행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예배하고 율법이 가르쳐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잘 시행되지 않을 때, 곧 직분자가 그 역할을 바르게 수행하지 않고,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에 대한 결정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결정을 전하실 것입니다.
선지자에 관한 규례를 다루기 전에 가나안 땅에서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가증한 행위란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나 점술 행위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살기 위해서, 앞날의 길흉을 알기 위해서, 타인을 통제하고 자신은 자유롭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들을 시행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보십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 땅에서 쫓겨나게 되는 심판을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그들과는 ‘완전하게’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처럼 자신들을 위해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꼐서 일으키신 ‘그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먼저 선지자의 일반적인 특징에 대해 생각해보지요. 첫째,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일으키십니다(15,18절). 즉 자기가 할 말이 있다고 스스로 선지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하실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일으키셔서 그를 통해 말씀하실 것입니다. 둘째, 참 선지자의 모델은 모세입니다(15,18절).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당대 가장 강력한 나라의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또한 모세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였고, 하나님께는 백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며 그들과 함께 고난을 겪으며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런 모세는 이후의 모든 참 선지자들의 모델이었지만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떤 선지자도 모세와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모세와 같으면서도 모세보다 더 탁월한 한 선지자를 기다리게 하였지요. 셋째, 함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말을 선지자의 입에 두겠다’(1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참 선지자에게는 권위가 있습니다(19절).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기기 때문에 주어진 권위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상이 참 선지자의 특징이라면 거짓 선지자의 특징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말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방자히 말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참 선지자를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선지자가 하는 저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2절은 단 하나의 기준을 제사힙니다. 곧 ‘성취’입니다. 선지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정말 그 말씀대로 되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주의하여 생각할 것은 이 방법은 궁극적인 것으로, 현실에서 ‘성취’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명확히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도 부분적으로, 또는 잠시 동안은 성취된 것처럼 보이는 예언을 할 수도 있고 성취된 것처럼 속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 선지자의 예언이 매우 더디게 성취되는 경우도 있지요. 실제로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딜레마이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고, 거짓 선지자들은 그럴리가 없다고 예언했지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까지 백성들의 눈에는 거짓 선지자의 말이 성취된 것처럼 보이고, 예레미야의 말은 성취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도 분별할 수 없단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완전하게 검증된, 즉 오랜 시간에 걸쳐 분명하게 성취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 선지자의 모델인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란 말씀도 이미 성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보다 크고 우월하신 참 선지자 예수님이십니다. 즉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된 전체 성경과 참 선지자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오늘날로 말하면 저 목사님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