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길 기도합시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본문을 읽고 난 후 아래 해설을 읽습니다.
아주 잔혹한 이야기
사사기의 마지막 이야기(19-21장)는 아주 끔찍하고 잔혹합니다. 이 이야기도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심히 악했던 이야기입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사는 한 레위 사람이 첩을 취하였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첩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지요. 당시에도 첩의 지위는 부인과 종의 중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레위인을 ‘남편’(3절)이라고 했다가 ‘주인’(27절)이라고도 말합니다.
2절은 이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네 달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개역성경이 ‘행음하다’라고 번역된 표현을 새번역성경은 ‘화를 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둘 다 가능한 번역인데요. 나중에 첩을 데리러 간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였다”(3절)라는 표현을 볼 때, 이 첩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화를 내고 남편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레위인이 딸을 찾으러 오자 레위인의 장인은 크게 환대합니다. 4-9절에서 장인은 떠나려는 레위인을 계속 붙잡으며 대접합니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만큼 환대하는 모습이 의아하지만,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레위인과 장인 사이에 철저히 배제된 첩(딸)입니다. 정황상 장인은 딸을 레위인과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였고,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특징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런 익명성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모습이 당시 레위인들의 모습이었고, 아버지들의 모습이었고, 여자들이 당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첩과 함께 길을 나선 레위인이 여부스 지역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었습니다. 하지만 레위인은 여부스를 지나 기브아로 가서 유숙하자고 합니다. 가나안 족속인 여부스 사람들의 도시보다 베냐민 사람들이 사는 기브아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기브아 성읍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을 환영하고 초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침 에브라임 출신의 한 노인이 발견하고 이들을 초대합니다. 20절에서 노인은 “거리에서 자지 말라”고 말하는데요. 이는 이 성읍 사람들이 단순히 나그네들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22절에서 우리는 노인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게 됩니다.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으로 몰려와서는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 레위인을 성폭행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노인이 나와 이런 악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면서 이 사람은 나의 손님이라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요. 이어지는 말이 충격적입니다. 노인은 자신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줄테니 그들을 욕보이든지 어찌하든지 임의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손님을 보호하는 것은 좋지만, 딸과 첩을 욕보이도록 내주는 모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실 이것이 가나안을 비로한 고대 근동 지역의 문화였습니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 정도로 생각했지요. 이것은 성경적 가치관이 아닙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기브아를 비롯해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부하고, 가나안의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땅은 소돔과 같이 되었습니다.
불량배들은 레위인의 첩을 밤새 성폭행하였고, 밤새 능욕당한 여인은 문 앞에 손을 뻗은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집을 향하여 필사적으로 돌아오려는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러나 지옥의 밤을 겪었을 그녀를 본 레위인의 말은 무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자”라고 말합니다. 대답이 없자 그녀를 나귀에 태워 떠나지요. 개역성경에는 이미 죽은 것으로 이해하고 시체라고 번역하였지만, 원문에 시체란 의미의 말은 없습니다. 즉 그녀가 이미 죽었는지, 그 이후에 죽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이후라면 이야기는 더욱 끔찍해집니다. 집으로 돌아온 레위인은 상상도 못할 끔찍한 일을 자행하는데요. 첩의 시체를 열두 토막 내어 이스라엘 각 지파로 보낸 것입니다. 아마도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여성에 대한 슬픔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사기 19장의 이야기는 읽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끔찍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모습이라는 것이 더 충격적입니다. 그들은 소돔과 가나안 사람들보다 끔찍합니다. 범죄를 저지른 기브아의 불량배들부터 레위인과 노인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인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왜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각자가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간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을 사람이 아닌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반대로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에 현혹되지 않고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진정 복된 삶이요, 가장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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