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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Lee Juman

문답 성경공부 : 마태복음 11장

[질문1] 마태복음 11:2. 예수님께서 요한을 옥에 갇히도록, 또 그렇게 죽음을 맞도록(14장) 두신 이유와 그 일을 인하여 이루신 뜻(결과)이 무엇일까요? 2절과 같은 질문을 한 것은 (힘든 상황 속에서) 그의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답변1] 요한이 옥에 갇히고 결국 허망하게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마태복음은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고자 할 때 많은 핍박을 당할 것이고,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인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미워하고 죽이려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고난과 죽음은 의미 없는 고난, 허망한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의 구원과 생명을 가져온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죽음은 이 구원과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가실 고난과 죽음의 길을 앞서 걸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보며 그분의 길을 따릅니다. 십자가의 길이지만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길입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이 '오실 그 메시아'가 맞는지 물었을 때, 그의 믿음이 흔들린 까닭은 자신의 힘든 상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행보와 예수님의 그것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메시아가 악한 로마의 정권이나 부패한 유대 지도자들을 심판할 것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마 3:12 참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이 일을 전하라 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기대와 생각에 맞추려 할 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의 기대와 생각을 고정할 때 우리는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질문2] 마태복음 11:2-3.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듣고 의구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2]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랬던 요한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은 그가 기대했던 메시아의 사역과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종말에 구원과 심판을 행하시는 메시아입니다(마 3:11-12 참고). 즉 로마의 권력을 물리치고, 부패했던 종교 지도자들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악한 권세자들이나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하고,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로마에 부역하는 세리와 같은 자를 가까이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기대하는 그런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신 그 일, 곧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이 일이야말로 예수님이 메시아 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질문3] 마태복음 11:11의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답변3] 여자가 낳은 자란 일반적인 출생 방식으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을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한 사람의 위대함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과 역할의 위대함을 말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사람으로, 구원의 새 시대를 알렸기에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옛 시대에 속하였기 때문에 메시아로 말미암아 성취된 천국에 속하지 못한다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오심을 통하여 구원 계시가 전진된 새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천국의 복과 구원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기에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큽니다. 즉 이 말씀은 옛 시대와 새 시대의 탁월함을 비교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질문4]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답변4] “침노를 당한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문법적으로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합니다. 먼저 '강력한 힘으로 온다'(중간태)라는 의미로 보면, 천국이 강력하게 공격한다고 번역되고,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이 강력하게 세상을 공격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역과 마태복음 12:25-29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잘 어울리는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폭력을 겪다, 고통을 당한다'(수동태)라는 의미로 보면, 천국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고,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이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세례 요한이 천국 복음을 예비하는 사역을 하다가 옥에 갇혀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과 잘 어울리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다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는데요. 이어지는 '침노하는 자'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침노하는 자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천국이 공격을 당하지만 천국에 속한 사람들도 공격하여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침노하는 자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고통을 겪고 있으며 폭력을 가하는 자들이 그것을 강제로 뺏고 있다.” 저는 마지막 견해가 본문을 보다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강대훈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고통을 가하는 자들이 그것을 강제로 뺏고 있다.”


천국의 두드러진 특징은 침노를 당하는 것, 곧 세상으로부터 공격,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을 예비하는 사역을 감당했던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은 것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엘리야 - 세례 요한, 예수님의 교훈(마 5:10-12)과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죽으심과 잘 조화되는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천국 백성, 곧 신자의 고난과 핍박은 이 땅에 임한 천국의 증거가 되고, 장차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전까지 일반적인 특징이 됩니다.



[질문5] 마태복음 11:14. 구약성경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언급한 성경말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5] 말라기 3:1은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말라기 4:5은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라기에 예언된 ‘내 사자’,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요 1:21), 그러나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와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눅 1:17).



[질문6] 마태복음 11:14에서 세례 요한을 ‘오리라 한 엘리야’로 언급하셨는데,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 중에서 엘리야로 굳이 언급된 이유가 있을까요? (엘리야의 사역과 연결해서 비슷한 점이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6] 예수님께서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라고 하신 이유는 말라기 4:5-6에 그렇게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4:5-6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엘리야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아비’는 복수 형태로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말라기에서 ‘아비’의 복수형은 2:10, 3:7에서 사용되었는데, 둘 다 ‘조상들’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요, 두 구절은 지금의(포로 후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들과 달리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고, 율법에 불순종하였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즉 선지자 엘리야가 와서 행할 사역은 포로 후기 백성들이 조상들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세를 통해 준 언약의 말씀들을 신실하게 지키도록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할을 할 선지자로 엘리야를 가리키신 이유를, 아합과 이세벨의 통치 아래 바알을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였던 엘리야의 사역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때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엘리야가 대결에서 승리하자,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9)라고 하였고요. 이러한 사역이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미리 그 길을 예비할 사자의 역할이었습니다(말 3:1 참고). 그런 이유로 말라기 선지자는 주님의 길을 예비할 선지자로 엘리야를 말했고, 예수님께서는 말라기가 예언한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질문7] 마태복음 11:16-17절에서, ‘너희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답변7] 예수님께서 이 세대(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를 가리켜 비유하신 말씀인데요. 그 의미는 18-19절에서 나오는 것처럼, 요한이 금욕적인 삶을 살며 회개하라 외쳤을 때에는 그의 금욕적인 삶을 두고 귀신이 들렸다 말하고,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며 사람들과 식탁에서 교제하시고 복음을 전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는 죄인의 친구라 비난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까닭은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복음을 들을 마음 없이, 이런 저런 이유로 핑계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8] 마태복음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옮다함을 얻느니라.” ‘그 행한 일’은 무엇을 말하나요?


[답변8] 사람들은 요한과 제자들의 금욕적인 생활에 대해서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와 달리 잘 먹고 마시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어지는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라는 말씀은 당시 속담, 격언일 수 있습니다. 지혜란 말이 아니라 행위로 옳음이 증명된다는 의미이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그것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사람들은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지금은 누구의 말이 옳은지 확실하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이 옳다는 것이 그분의 행하신 모든 일을 통해 증명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모든 구원 사역을 행하신 후에 사람들은 그것이 옳았다고, 정말 하나님의 지혜였다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질문9]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목적과 의도, 기적과 권능을 많이 행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11:20을 보면 기적을 많이 행하셨으면 더 잘 믿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믿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이것은 예수님의 목적과 의도가 실패한 것 아닌가요?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9] 마태복음 11:20에서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을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신 의도와 목적이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저는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행하신 기적과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사실, 곧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여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 복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것이고 화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할 것입니다. 복음은 어떤 이에게는 반석이 될 것이고, 다른 이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권능을 행하신 이유(목적)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고, 거절하는 자들은 심판하시기 위함이라고 이해한다면, 이들의 회개하지 않음은 예수님의 사역의 실패가 아닌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질문10] (앞의 질문에 이어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기적을 행해 주셨다고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도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답변10]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그리고 사도들이 행한 기적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지요. 물론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도 그 목적 안에 포함되지만, 기적의 주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약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이런 의미의 기적은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해서 기록된 성경을 통해 분명하고 충분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어떤 기적들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했던 기적과는 다른 것입니다.


간증에 관하여 첨언하자면, 오늘날 간증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상당수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높이기 보다, 간증하는 당사자를 주목하게 하고, 어떻게 하면 나도 저런 기적과 복을 받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그와 같은 간증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불치병에 걸린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믿음은 병을 낫게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병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놀랍게 치유된 것뿐만 아니라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믿음으로 굳게 인내하는 것 또한 우리의 간증으로 합당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삶은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간증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뭔가 더 특별한 은혜를 주신 것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고, 나에게 뭔가 더 특별한 은혜가 있는 것처럼 간증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 그 이상의 기적, 은혜, 복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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