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마태복음 12:4. 안식일의 본래 의미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율법적인 측면으로 안식일을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다윗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어 먹게 하였던 것인데요. 궁금한 것은 구약성경에 보면 언약궤에 손을 대거나, 다른 불을 드려서 즉시 심판을 받는 모습이 나오면서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다윗의 경우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1]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입니다. 그런데 안식일 명령은 본래 하나님을 위해서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해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 때부터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복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안식일 계명을 주셨는지를 이해한다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제사장의 진설병을 먹거나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질문해 주신 것은 율법을 엄격히 지켜야 했던 구약시대에 아히멜렉 제사장은 어떻게 제사장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다윗에게 준 것과 다윗이 그것을 요구하고 먹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우리는 구약의 모든 성도가 바리새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율법을 지켰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약의 성도 중에서도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고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은 율법을 따라 진설병을 관리하고 구별하여 먹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경우 그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양식이 필요했고, 다른 양식이 없고 오직 진설병만 남아 있었을 때 아히멜렉은 다윗의 생명을 위해 진설병 먹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율법에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모든 일을 쉬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을 멈추는 까닭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과 생명을 누리며 안식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 안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일은 합당합니다.
[질문2] 마태복음 12:7-8. 안식일에 관한 말씀을 보면서, 안식일 규례가 믿는 사람들에게 딜레마처럼 느껴지는데요. 안식일에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하면 안 되는지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특별히 직업상 주일에 일을 하게 될 때 부담감과 죄책감을 많이 갖게 되어 집중하지 못할 때도 있는데요.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관하여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2] 본문을 통해 안식일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의도가 무엇인지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우리의 행복을 억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반대이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며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6일 동안 수고했던 일을 멈추고 쉬라 하신 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여 안심하고 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 지, 그 은혜가 얼마나 신실하고 진실한지 기억하기 위해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안식일을 주셨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때 생명과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인데, 마치 하나님께서 손해를 보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직업상 주일에 일을 하게 될 때 부담감과 죄책감을 갖게 된다고 하셨는데요. 주일에 일을 하는 것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모든 직업을 일반화시켜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어떤 직업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직업이 그런 경우이겠지요. 소방관, 의료인, 군인, 경찰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경우 주말에 당직 근무를 하게 되어 주일을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부득이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위와 같은 직업이 아니더라도 내가 어떤 직장에 소속되어 있고, 그 직장 안에서 주일에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직업은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는 생업이기 때문에 그때 주일에 일을 하게 되는 것도 어느 정도 부득이한 일로 생각됩니다. 모든 신자가 주일을 잘 지킬 수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당장 상황이 바뀔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자유롭고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해 주시길 기도하면서 할 수 있는 대로 힘써서 주일을 잘 지키고, 부득이하게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는 주일 저녁이나 다음 날에라도 주일예배의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목회적 돌봄을 잘 받으며 성도의 교제에도 더욱 힘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질문3] 마태복음 12:9-21,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는데 그럼 전에는 안식일에는 어려움에 처한(구덩이에 빠졌거나 급한 처치가 필요한 상황) 사람을 돕는 것이 죄(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가 되었나요?
[답변3]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생명이 위급한 경우 외에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손 마른 사람의 경우 당장 긴급하게 치료해야 하는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미 오랜 시간 장애를 가지고 살아왔는데, 하루가 지난 후에 치료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손 마른 사람을 앞에 두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은지 물은 것은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 대신,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구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안식일이라도 구덩이에 빠진 가축은 구했기 때문이지요. 바리새인들의 일관되지 않은 태도를 지적하신 것인데요. 그들은 다른 사람의 치료 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자신들의 재산권에 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기준을 적용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이 사안(안식일에 짐승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유대인 사이에서도 논쟁 중이었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양보다 훨씬 귀하다고 하시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곧 손 마른 환자를 치유하시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질문4] 마태복음 12:12.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소방관이나 경찰과 같은 공직자들이 주일에 상황 근무를 서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답변4] 소방관, 경찰, 군인, 의료진 등 모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의무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주일에 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로 보입니다. 즉 그 일로 인해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자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안식일은 우리의 복과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주일을 지키기 위해 힘쓰고, 주일에 근무를 해야 하는 경우에도 다음날 휴식할 때 주일예배 설교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연락하며 성도의 교제를 이어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해 목회적 돌봄을 잘 받을 필요도 있겠습니다.
[질문5] 마태복음 12:18-21,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로부터 피하시고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신 것이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답변5]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이것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8:4; 12:16; 16:20; 17:9). 이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예수님께서 아직 자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단순히 기적에 대한 열광으로 예수님께 몰려오는 것을 경계하셨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2:16-21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는데요, 이사야 42:1-4을 인용하며,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말씀은, 하나님의 택하신 메시아가 이방에 공의를 알게 하실 것인데, 아주 겸손히 낮아져서 그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12:19(새번역)은 이렇습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실 것이지만 겸손히, 조용히 그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질문6] 마태복음 12:22-37을 보면 “바리새인 =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는 사람 = 좋지 않은 실과를 맺는 나무 = 마음에 악한 것이 가득하여 악을 말하는 자 = 악을 쌓은 사람 = 무익한 말을 하는 정죄 받을 자들”인데요. “성령 훼방죄”는 무엇을 의미하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말한 것이 “성령훼방죄”에 해당하고 이것이 악한 말을 하고 악한 열매를 맺는 악인이라는 증거인가요?
[답변6]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라는 말씀은 31-32절에 나오는데요. 31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사역을 두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냈다고 폄훼한 바리새인들의 말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2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성령님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사역이라고 모독한 것입니다. 성령님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증거인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부인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성령님이 행하신 일을 악의적으로 부인하고 폄훼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거역하고 부정하는 것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32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32절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을 수 있지만,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까닭은 아직 예수님의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도 의문을 가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였던 베드로도 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26장). 그렇다면 말로 성령님을 거역하는 죄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죄가 삼위 하나님을 악의적으로 대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귀신의 사역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불신과 악의로 삼위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이 죄를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불신과 악의로 하나님을 대적한 이 사람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과거에 불신과 악의로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사람이라도 참된 믿음으로 회개하면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사함을 받을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스스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한 것이 아닌지 불안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민감함은 오히려 그것이 성령 훼방죄가 아니라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는 사람은 자신이 성령을 훼방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7] 마태복음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라는 말씀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답변7]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한 것이라며, 예수님을 폄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라 하시며(25-26절),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셨는데요. 어떤 사람이 강한 자의 집에서 재산을 강탈하려고 한다면, 먼저 그 강한 자를 제압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것이 당연하지 않냐는 것이지요.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강한 자인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강한 자 마귀를 제압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도둑질을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이사야 49-24-25의 이미지를 취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원수인 강한 자(용사)의 손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사야서에 담긴 이 구원의 이미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질문8] 마태복음 12:39, 16:4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을 특별히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8] 마태복음 12:40에서 예수님은 ‘요나가 3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3일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고, 조금 더 확장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41절은 요나의 표적을 회개와 정죄, 곧 심판과 연결합니다. 악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니느웨 사람들도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는데, 이 세대는 요나보다 크고 위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고 믿지 않음으로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에게 보일 표적이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행하신 많은 기적들이 있음에도 믿지 않으려고 하는 그들에게 다른 어떤 표적도 소용이 없고, 오직 이 표적이 가리키는 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표적이 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정죄(심판)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을 이렇게 이해하고 마태복음 16:1-4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병이어 기적을 포함하여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다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는 목적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표적이,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정죄의 표적이 됩니다.
[질문9] 마태복음 12:43~45. 비유의 정확한 해석이 궁금합니다. '물 없는 곳'의 의미는 무엇인지, '비고 청소되고 수리된 집' 이란 겉보기에만 깨끗한 집을 의미하는지, 비었다는 것을 성령님의 부재로 해석해도 되는지요?
[답변9] 45절을 보면 이 비유는 ‘악한 세대’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문맥을 볼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악한 세대는 마치 악한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악한 세대에게 가르치시고 표적을 보이심으로 이 세대를 사로잡는 귀신이 쫓겨나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고 깨끗하게 된 공간이 예수님으로(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이내 그곳에는 더 많은 귀신들로 채워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표적보다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교훈하십니다. 표적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내 더 많은 귀신들로 채워질 것이고, 이전보다 못한 삶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 귀신이 물 없는 곳을 다니며 쉬기를 구하였다는 말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귀신이 광야와 같이 마르고 황폐한 곳을 선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추측을 해볼 수 있지만,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비유를 통해 귀신에 대한 어떤 지식을 얻으려 하는 것은 크게 유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비유는 악한 세대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한 말씀이지, 귀신에 대한 지식을 주는 교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문10] 마태복음 12:44에서 ‘소제’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답변10]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함”이란 뜻의 소제(掃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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