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신 후에,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마 8:4)라고 하셨는데, ‘모세의 명한 예물’이 무엇인가요?
[답변1] 본문에서 ‘모세의 명한 예물’은 치유된 나병환자의 정결의식을 위해 필요한 예물과(레 14:4-9), 제8일에 드리는 제사의 제물(레 14:10-13)을 의미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의 치유와 깨끗하게 됨을 판단하고 선언하는 것은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레위기 14장에 의하면 나병에서 치유된 환자는 제사장 앞에 확인을 받고, 정결의식을 행하고(7일), 8일째 되는 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사회와 신앙 공동체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질문2] 마태복음 8:5-13에서 백부장이 예수님께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는데, 백부장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답변2] 백부장의 믿음을 잘 보여주는 말인데요. 군대에서 지휘관이 명령하면 병사는 그대로 따릅니다. 주인이 종에게 명령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휘관과 주인에게는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백부장의 말은, 예수님은 질병에 대해서 마치 지휘관과 주인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곧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귀신이 순종하여 떠나고, 질병이 순종하여 떠나고, 죽음이 순종하여 떠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의 이 믿음은 이스라엘 중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질문3] 마태복음 8:18-22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달리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인가요 ?
[답변3]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다음과 같이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유추해 볼 때, 서기관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더 실력있는 율법학자가 되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그런 안정이나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예수님을 좇는 것이 우리의 성공과 안정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제자 중 한 사람이 와서 ‘나로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먼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던 것은 우선순위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님을 좇는 것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면, 먼저 해야할 것은 예수님을 좇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질문4] 마태복음 8:22은 무슨 의미인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답변4] 22절의 요지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심지어 가족의 의무와 책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 곧 제자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의 일을 우선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례의 의무와 책임은 무척 중요한 것이지만, 만일 그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살아 있는 자는 ‘먼저’ 예수님을 좇는다는 의미이겠습니다.
[질문5] 공관복음에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같은 사건이 다르게 기록된 것인지, 다른 사건이 비슷하게 기록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8장의 군대귀신 사건에 대한 기록에서 마태는 두 사람으로, 마가, 누가는 한 사람으로 기록하였는데,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또 9장에서 두 맹인이 치유받는 사건에 대해서 마가는 뱃세다 맹인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같은 사건을 달리 표현한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사건인가요?
[답변5] 8장 군대귀신 사건에서 마태는 귀신들린 자를 두 사람으로, 마가와 누가는 한 사람으로 기록한 것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은 본래 두 사람이었는데, 마가와 누가는 한 사람만을 기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칼뱅, 매튜헨리, 매튜풀). 최근에 복음서의 장르를 ‘그레코-로만 전기’로 보는 관점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복음서가 당시 그레코-로만 전기라는 장르와 매우 유사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이클 리코나라는 신학자는 복음서의 상이성은 왜 나타나는가에 대해 아주 치밀하게 연구하여 책을 냈는데요(why are there differences in the gospels?), 여기서 리코나는 그레코-로만 전기 형식으로 쓰여진 당대의 문헌들의 특징들과 복음서를 비교하면서, 당시에 전기 작가들에게 허용되었던 여러 가지 관행들을 소개합니다. 그 중에 ‘집중’(spotlighting)이라는 관행이 있는데, 이것은 현장에 여러 사람이 있었으나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여 사건을 전개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타키투스의 역사서에서는 네로, 오토, 폼페아 세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며 세 명의 심리나 상태를 골고루 작성하는데, 전기에서는 오토라는 인물만 집중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로 부활의 날에 나타난 사람으로 공관복음은 여인들을 언급하는데,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을 예로 듭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은 두 사람이었는데, 마가와 누가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질문6] <앞의 질문에 대한 추가질문> 신현우 교수님의 강의 해설을 보니, 마태가 2명을 좋아해서 이렇게 기록했다고 하셨더라고요. 그 연장선상에서 뒤에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사건에서도 마태는 ‘나귀와 나귀새끼’ 이렇게 기록했는데, 이것은 구약성경이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거라사 광인 사건은 원래는 1명의 인물이 맞는데 마태가 의도적으로(예를 들어 이 사건이 새 출애굽으로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기 위해) 2명으로 기록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러한 관점과 해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답변6]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두 배로 표현되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주석들을 보아도 여기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찾기 어렵네요. 신현우 교수님은 그러한 차이가 마태의 기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신현우 교수님의 관점과 해석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복음서의 상이성을 이해할 때 가능하다면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기록된 사건보다 실제 사건은 훨씬 클 수밖에 없습니다. 기록은 사건을 다 담을 수 없지요. 실제 사건의 순서도 기록으로 완전하게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복음서는 사건 기록에 시간의 변화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리코나라는 학자의 연구에서도 당시 전기 작가들에게 허용되었던 여러 가지 관행들을 볼 때, 단축, 집중, 단순화 등 실제 사건을 집중하거나 축약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요. 그래서 저는 마태가 기록한대로 본래 귀신들린 사람이 2명이지만, 어떤 이유에서 마가와 누가는 한 사람에 집중하여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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