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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Lee Juman

복음 안에서 자아 찾기 (1) 나는 누구인가

최종 수정일: 2일 전

*이 시리즈는 "나는 누구인가요"(이정규, SFC)라는 책의 내용을 교재로 삼아 요약한 것입니다.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책을 직접 읽어보시기 권합니다. "1장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티모시 켈러, 복 있는 사람),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앨런 노블, 두란노)와 같은 책들도 함께 읽으면 유익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한해 동안 벨직 신앙고백을 공부하며, 성경이 가르쳐 주는 진리의 큰 주제들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죄가 무엇인지, 구원이란 무엇인지, 교회란 무엇인지, 마지막 날에 어떤 일이 있을지 등과 같은 질문에 대하여 생각하였는데요, 배우고 공부한 내용들이 우리 안에 잘 정리가 되어 우리의 고백이 되었길, 더 나아가 이러한 질문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잘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교리의 토대 위에서 3주 정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되겠네요.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그것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고,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과연 현대의 세계관이 더 큰 행복을 주는가


나는 누구일까요? 여러분 앞에 있는 저는 목사입니다. 지난 주에 학기가 끝났지만 대학원에서는 학생이고, 가정에서는 남편이고, 아빠이고, 아들입니다. 저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마 교회에서 여러분이 보는 저의 모습과 학교에서 저의 모습, 가정에서의 모습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겁니다. 이런 관계 속에 있지 않을 때, 즉 나 혼자 있고 아무도 보지 않는 그때의 내 모습은 또 다를 수 있겠습니다. 이 모습들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 나의 모습입니까? 우리를 규정하는 많은 역할과 많은 모습 가운데 일관적으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과거의 사람들과 현대의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대답을 합니다.


과거의 세계관에서는, 나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 역할, 의무, 관계 속에서 나의 정체성이 형성되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과 의무를 잘 수행하는 삶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라 여겨졌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부여된 것이기 때문에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세계관 안에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억압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성들은 대체로 자신의 꿈을 가지거나 펼칠 수 없었고, 신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세계관은 다릅니다. 현대의 세계관은 내가 꿈꾸고 욕망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누구여야 하는지 다른 누가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나 스스로 정할 수 있고 정한 대로 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의무와 역할이 나에게 강제되어서는 안 되다고 생각합니다. 내 삶의 가치와 의미는 내가 바라고 욕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외부에서 나에게 부여한 신분, 의무, 역할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억압된 삶을 살아야 했던 과거 집단주의적 사회에 비교하면 현대의 세계관은 여러 모로 더 자유롭고 좋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세계관은 과거의 세계관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일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함정이 존재합니다. 첫째, 나는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 안에는 여러 가지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은 서로 부딪힙니다.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학생의 마음 안에 시험 전날 게임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어떤 욕망이 이 학생의 ‘진짜 나’일까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네 느낌을 믿고, 그대로 살아라”라는 말을 듣곤 하지만, 수많은 느낌과 욕망 중 어떤 것이 진짜 나의 느낌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기 어렵습니다.


둘째, ‘나’라는 정체성은 집단과 사회에서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정체성을 결정할 권한과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속한 집단과 공동체,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기 결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이애 대한 재미있는 사고 실험을 제안하는데요. AD 800년 영국의 앵글로색슨족 전사와 오늘날 뉴욕 맨해튼의 한 청년을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두 가지 충동을 강하게 느낍니다. 하나는 폭력적인 성향이고 다른 하나는 동성애적 성향입니다. 앵글로색슨족 전사는 어떻게 할까요? 전투가 일상적이고 명예와 전사의 도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에 살고 있는 그는 전투를 즐기는 자신을 ‘이게 나다, 이게 내 정체성이다. 이대로 표현하자’라고 생각할 것이고, 동성애 성향에 대해서는 ‘이건 내가 아니다. 제어하고 억압하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날 뉴욕 맨해튼의 사는 청년은 어떨까요? 정반대의 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지요. 현대인이라고 해서 내가 결정한 나의 정체성이 내가 속한 사회와 문화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꿈을 이루지 못하면 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나의 꿈이 나의 정체성이요, 인생이라면, 그 꿈을 이루지 못할 때 나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내 인생은 악몽이 될 것입니다. 꿈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고 권장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꿈을 이루는 것이 나의 정체성과 가치와 의미를 결정한다고 믿는 순간,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 우리는 슬퍼하는 정도를 넘어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 나의 꿈과 갈망이 나라고 규정해도,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갈망할 때, 우리는 갈망하는 그 무언가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꿈과 갈망을 이룰 때까지 쉬지 못하고 그것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꿈과 갈망을 이루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정말 원하고 갈망하는게 이거였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아쉬움과 불만족이 남아 있습니다.



성경의 대답 :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렇다면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과거는 훨씬 더 억압적이었습니다. 좋은 소식은 우리는 과거의 세계관으로 돌아가거나 현대의 세계관에 머무르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대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적 세계관입니다.


사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엄밀히 말해 “나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과 일맥상통합니다. 과거에는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나의 의무와 역할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나는 내가 속한 가정과 사회의 것이다”라고 생각했다면, 현대에는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나의 꿈과 욕망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나는 나의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서, 성경 한 구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4:3-4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당시 바울은 심하게 판단을 받고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지도자에 따라 분열되어 있었고, 다른 지도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비난하였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판단하고 비난할 때 우리는 대개 두 가지 반응을 취하기 쉽습니다. 하나는 “네가 뭔데 날 판단해?”라고 분노하며 부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정말 형편없어!”라고 자학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울은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바울은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받고 비난당하는 것이 내게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단순히 “남들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 나의 판단이 중요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어서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것이 나를 의롭게 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여기서 바울은 과거의 사고방식도, 현대의 사고방식도 아닌 전혀 다른 세계관을 말해줍니다. 과거의 세계관은 “나는 내가 소속된 집단의 것이다”라고 말하고, 현대의 세계관은 “나는 나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의 것도, 내가 소속된 집단의 것도 아니다. 나는 나를 판단하시는 주님의 것이다!” 이것이 바울에게 참된 자유를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자아 정체성을 아는데 가장 중요한 교리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서신 전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유사한 표현 포함) 166회 정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바울이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라고 질문을 받았다면, 아마도 그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스벤 소더룬트).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여러 관계를 포괄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용어입니다. 성경은 이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6-27)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몸에 더러운 것이 묻었었도 깨끗한 옷을 입으면 깨끗하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의로우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옷이 되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처럼 의롭고 깨끗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신자의 이러한 측면을 “죄인이자 의인”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사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게 해방하셨습니다.” 내가 나와 같이 연약하고 불완전한 죄인의 것이라면 나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속한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이 사실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자유를 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어야 위로가 되지,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는게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창조하셔서 나에 대하여 가장 잘 아시는 분, 나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아시는 분, 나보다 훨씬 선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으신 분, 나를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는 분이 나의 주인이라면 어떻습니까? 거기에 우리의 진정한 위로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참된 행복과 자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서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참된 자아를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시고, 죄와 비참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온전케 하시는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과 우리를 동일시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경멸하고 미워하는 최악의 죄인을 나와 동일시한다면, 우리는 매우 불쾌하고 분노할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의로우신 우리 주님께서는 최악의 죄인인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하셔서, 최악의 죄인 취급을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와 연합하여 우리의 옷이 되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나와 연합하셔서, 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왜 나는 다른 곳에서 나의 자아를,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가? 왜 나는 나의 욕망과 성취와 꿈을 이룸으로 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 하고, 그것으로 인해 절망하기도 하고 우쭐해지기도 하나요?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옷이 되어주셨는데, 다른 옷이 우리에게 또 필요할까요? 아직 예수님을 나의 주와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십시오. 거기에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있고 기쁨이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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