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여러분이 아주 유명한 고급 레스토랑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영상이나 SNS로만 보던 그 식당에 들어가서, 방송에 나왔던 유명한 쉐프를 직접 보고, 깔끔하게 정돈된 식탁에 앉았습니다. 곧 아름답게 장식된,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소문의 그 음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막 음식을 집어 입에 넣으려고 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리고, 아주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당장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와 있는 음식이라도 얼른 한 입을 먹고 서둘러 나오게 되었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아주 좋은, 맛있는 음식을 보고 냄새도 맡고 맛도 조금 보았지만, 그것을 충분히 씹고 소화하며 즐거움과 유익을 얻을 기회는 갖지 못하게 된 것, 묵상 없는 신앙생활이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주일에 설교를 듣고, 시간을 내서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읽기만 할 뿐, 그것을 씹어 소화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말씀을 깊이 되새기는 시간을 갖기도 전에 세상의 분주함, 즐거움, 염려에 좇겨 황급히 달려나갑니다. 말씀이 가르치는 것을 어느정도 알고 있을지 몰라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말씀을 즐거워하거나 그것을 삶에 깊이 적용하지는 못하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묵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자신이 심긴 곳에서 싹을 틔어 꽃을 피우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시련을 겪더라도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습니다. 그들은 동정심과 인정이 많지만 의지 또한 강철같이 굳세고, 믿음을 위해 나서야 할 때는 놀라운 용기를 발휘하기까지 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해 그들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긷는 법을 깨우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시냇가에 살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합니다(조엘 비키).
묵상이란 무엇인가
시편 1:2을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묵상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하가’는 ‘작은 소리로 반복해서 웅얼거리거나 읊조리면서 마음 속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 내어서, 반복해서, 깊이 생각하며 읽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소가 풀을 여러번 되새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 번 씹어서는 소화하기 힘들기 때문에 여러번 되새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 슬쩍 읽어서는 충분히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말씀을 잘 씹어 소화하는 것’이 ‘묵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존 볼은 “묵상이 없으면 진리를 삼키기만 하고 소화하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된다.”라고 말했고, 토머스 왓슨은 “다섯 편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한 편의 설교를 묵상하는 것이 더 낫다. 설교를 들어도 유익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주된 이유는 새김질을 하지 않는 것, 곧 들은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것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오랜시간 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도 많이 읽었지만, 은혜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에 대한 지식은 늘어가지만 복음이 주는 기쁨과 평안은 잘 누리지 못하고, 신앙의 활기와 열정을 잃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묵상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안에 머물지 않는다. 마음은 강퍅해지고 기억은 가물거리게 된다. 묵상이 없으면 설교 말씀을 들어도 열정은 생기지 않고 지식만 늘어가기 쉽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어도 그것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소화되어 유익이 되고 힘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고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되새김에 관하여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되새김이란 사람들이 감정을 가지고 다시 한번 말씀을 보고 아주 열심히 그것을 묵상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는 속담같이 되지 않으며 또한 말씀이 마음에 오래 머물러 있고 밑으로 가라앉아 가장 깊은 내부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묵상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를 향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향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 가르쳐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그에 대한 반응을 기대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이것은 묵상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생각하고 곱씹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적절히 반응하는 행위가 바로 성경 묵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묵상할 때 우리는 먼저 성경 본문을 깊이 생각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서 그 의미가 나와 우리에게 주는 함의를 찾고, 그 판단에 따라 적절히 반응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상이야 말로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가장 적합한 성경 읽기 방식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단순히 듣기만 하고, 성경을 단순히 읽기만 하고 묵상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맛만 보거나, 아니면 먹긴 먹었지만 급히 삼켜서 맛을 누리지도 못하고 소화도 못시켜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묵상의 실천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묵상은 단순히 깊이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청교도 리처드 그린햄은 “묵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를 상기시켜 더 깊이 생각하게 하고,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실천하게 만드는 사고 활동을 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적인 묵상은 언제나 우리의 행위의 변화와 새로운 결심과 실천의 열매를 맺습니다.
기도, 묵상, 시련(실천)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고 풍성한 묵상을 담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시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요구되는 세 가지 규칙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oratio), 묵상(meditatio), 시련(tentatio)입니다. 기도라고 번역된 ‘오라티오’라는 말의 핵심적인 의미는 “이성의 인도가 아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세”를 뜻합니다. ‘오라티오’의 원리는 성경 묵상 전에 명심해야 할 마음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이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시 119:27).
‘묵상’과 관련해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두 번째로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은 묵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슴뿐만 아니라 입으로 소리 내어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계속 반복하여 주도면밀하게 읽고 또 읽어야 하며 성령님께서 그 말씀으로 무엇을 의도하시는지를 깊이 상고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 말씀을 싫증 내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한 당신이 두 번 읽은 것으로 충분히 읽고 듣고 말했다고 생각하여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게끔 주의하십시오.”
세 번째로 ‘덴타티오’는 ‘시련’ 또는 ‘실천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현실, 교회의 현실, 사회와 역사의 한복판에서 경검하고 내 영혼이 붙잡고 씨름하는 모든 종류의 아픔과 불안과 괴로움과 절망 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즉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씨름하는 모든 삶의 고뇌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루터는 진지한 ‘오라티오’(기도)에서 출발하고 ‘메디타티오’(묵상)를 거친 성경 연구는 반드시 덴타티오(실천)에 도달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은 말씀의 실천을 통해 성경 묵상의 참 열매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을 보면,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말하기 전에,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119:97도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묵상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묵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면 우리는 주야로 돈을 묵상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면 우리는 주야로 세상의 즐거움을 묵상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아무 것도 묵상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항상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무엇을 묵상하고 있었을까요?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것,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즐거워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즐겁고 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비가 올 때나 가뭄이 들 때나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묵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사람은 성공하고 형통할 때 뿐만 아니라 실패하고 고난을 겪을 때에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선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수단으로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주셨습니다. 묵상은 그 은혜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그 은혜의 효력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발휘되게 하는 방도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하는 마음의 축복은 세상이 줄 수 있는 다른 그 어떤 축복보다 크고 고귀한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 모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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