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앙리의 전쟁(1587-1589)
1585년 7월 7일, 앙리 3세는 가톨릭 동맹의 압박에 굴복하여 느무르 조약을 맺게 됩니다. 위그노 예배를 엄격히 금지되었고, 목회자들은 추방되었습니다. 여섯 달 안에 가톨릭으로 돌아오지 않는 위그노들도 추방하겠다고 위협했지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8차 종교전쟁이 시작됩니다(1585-1598). 이 전쟁에서 세 앙리가 각축전을 벌렸기 때문에, “세 앙리의 전쟁”(Guerre des Trois Henri, 1587-1589)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앙리 3세는 가톨릭 동맹을 이끄는 기즈 공 앙리가 파리 시민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얻는 것에 큰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1588년 5월 앙리 3세는 앙리 드 기즈의 수도 입성을 금지시킵니다. 하지만 앙리 드 기즈는 당당히 입성해 파리 시민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습니다. 앙리 3세는 군대를 동원했지만, 시민들의 대항으로 오히려 궁전을 탈출해 도망해야 했습니다. 앙심을 품은 앙리 3세는 앙리 드 기즈와 기즈 추기경을 암살하게 되지요. 그리고 가톨릭 세력의 반발에 맞서기 위해 사촌인 앙리 드 나바르와 손을 잡고 국면을 유리하게 이끄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앙리 3세는 열혈 가톨릭주의자 자크 클레망의 암살 시도에 큰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합니다.
앙리 4세(b1553, r1589 - d1610)와 낭트 칙령(1598)
앙리 3세를 끝으로 발루아 왕가는 단절되고, 왕위 계승법에 따라 부르봉 왕가의 앙리 드 나바르가 앙리 4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합니다. 당연히 가톨릭 세력의 반발이 거셌지요. 앙리 4세는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고 합니다. “나는 국왕이지만 나라고 없고, 남편이지만 아내가 없으며, 전사이지만 재정이 없다.” 앙리의 탄식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앙리가 이끄는 위그노 군대가 가톨릭 동맹군에 승리하였고, 파리를 포위합니다. 하지만 가혹하게 봉쇄하지 않고 물러납니다. “짐은 공동묘지를 통치할 생각은 없다.”
가톨릭 세력은 여전히 앙리 4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앙리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요구하였습니다. 1593년 7월 25일 앙리 4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앙리의 친구이자 독실한 위그노였던 쉴리가 앙리를 설득하였다고 알려졌습니다. 앙리는 개종을 받아들이며 “파리는 미사를 드려서라도 얻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고 하지요. 많은 위그노들이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의 개종의 이유, 진정성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가톨릭으로 전향한 후 앙리는 프랑스의 평화와 번영에 전념합니다. 그는 정적 마이엔느 공과 스페인과의 관계를 회복하였고, 곧 교황청과도 원만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전쟁을 끝내는 일 외에도 그에겐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국토는 황폐해져 있었고, 백성들은 빈곤에 허덕였습니다. 앙리의 곁에서 산적한 국정 운영을 도운 사람은 위그노 친구인 쉴리의 공작 막시밀리앵 드 베튄이었습니다. 그는 정직과 능력을 겸비하였고 모든 면에서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위그노와 가톨릭을 적절히 중재하면서 프랑스의 국력 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는 부패한 관리들에게 국세를 착실하게 징수하는 한편 가난한 농민들의 세금은 감소시켰습니다. 앙리 4세 역시 소작농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제정합니다. 곧 “선한 왕 앙리”라는 소문이 돌았지요.
<쉴리 공작 막시밀리앙 드 베튄>
쉴리는 왕의 개종을 설득하고, 재상으로 왕을 섬겼지만 평생 위그노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의 집무실에는 칼뱅과 루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지요. 앙리 4세는 그의 솔직함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경이 내게 반대하지 않으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네.” 하지만 가톨릭 정치인들에게는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앙리 4세가 암살 당한 후 쉴리는 가톨릭 세력에 의해 국정에서 배제되고, 영지로 물러가 조용히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왕권을 견고하게 확립한 앙리 4세는 1598년 4월, 낭트 칙령을 발표합니다. 낭트 칙령은 위그노를 위한 양심의 자유와 예배의 자유를 요점으로 삼습니다. 파리를 포함한 가톨릭이 강한 지역에서는 예배가 허락되지 않았지만, 과거 위그노들이 예배했던 지역에서는 어디에서나 예배당을 건축하고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법관을 둘 수 있었고, 학교나 대학에서 동등하게 교육 받을 수 있었고, 위그노 지역에서는 학교를 세울 수 있는 권리도 주어졌습니다. 모든 직업이 허용되었고, 공직에도 진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령에 따라 위그노 지역에서 총회, 노회와 같은 행사를 열 수 있고, 필요한 재정도 지원해 주었습니다.
<낭트 칙령 원본>
낭트 칙령이 위그노들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오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톨릭 세력이 적개심을 갖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정도에서 최소한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낭트 칙령은 위그노의 소수 상태를 제도화, 공식화하였고, 최소한의 자유를 일시적으로 보호받는 대가로 복음 전도와 교회의 확장을 제한 당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1600년 12월 5일, 앙리 4세는 제네바 인근에 있는 엘리쥐에서 81세 노령의 베자와 만납니다. 앙리 4세는 베자를 따뜻하게 환대하였고, 베자를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앙리는 종교전쟁의 고통과 위험을 털어 놓았고, 베자는 위그노를 위한 충언을 하며 낭트 칙령을 잘 시행해 주길 부탁했습니다. 5년 후, 1605년 10월 23일 베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비록 제네바에 묻혔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교회의 개혁자요 지도자였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5년 후인 1610년 5월 14일, 앙리 4세는 재상 쉴리의 병문안을 가는 길에 가톨릭 열광주의자 프랑수아 라바약의 단검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둡니다. 앙리 4세는 모친인 쟌느 달브레에게 위그노 신앙을 교육받았지만, 그의 자녀들은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랐습니다. 위그노들에게는 다시 어둡고 차가운 미래가 예고되었지요.
루이 14세(b1638, r1643 - d1715)와 낭트 칙령 폐지(1685)
앙리 4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루이 13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당시 9살이었던 루이를 대신해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가 섭정을 합니다. 마리와 루이 13세 모두 낭트 칙령을 훼손 없이 보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국정은 완연하게 가톨릭으로 돌아섰고, 자연스럽게 위그노에 대한 박해도 재개되었습니다.
1618년 네덜란드 도르트레흐트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국제회의가 열리게 됩니다(도르트 총회, 1618.11.13 - 1619.5.9). 프랑스 교회도 초청을 받아 네 사람(피에르 뒤 물랭, 앙드레 리베, 다니엘 샤미에, 쟝 쇼브)을 대표로 파송하기로 했지요. 하지만 가톨릭과 항론파의 사주를 받은 루이 13세의 출국 금지령으로 대표단의 파송은 좌절되었습니다. 비록 총회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총회는 프랑스 교회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영국 대표단 뒤 네 좌석을 비워두었지요.
1643년 5월 14일 루이 14세가 다섯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안느가 섭정을 맡고, 추기경 쥘 마자랭이 재상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한 후 루이 14세의 독자적인 통치가 시작되는데요. 일명 “태양왕”이라 불리는 루이 14세는 72년 이상 재위하여 유럽 군주제 역사에서 가장 오래 통치한 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절대왕정을 실현하며 극심하게 위그노를 탄압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위그노들은 루이가 실권을 잡기 이전에 두 차례 총회(1645, 1660)를 겨우 갖고 루이의 실권 장악 후 66년 동안 총회가 중단됩니다.
1681년 루이 14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위그노들을 색출하여 투옥, 고문, 살해하기 위해 용기병을 창설합니다. 루이 14세는 할아버지 앙리 4세와 같은 절대왕정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한 신앙, 한 헌법, 한 국왕”이라는 구호 아래 프랑스 대통합을 추진했고, 그 방법은 위그노를 박멸하는 것이었습니다.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완전히 철회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합니다. 그 내용은 개혁교회 예배당을 파괴하고 예배를 금지하는 것, 개혁파 설교자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2주 안에 프랑스를 떠나라는 것, 개혁파 학교를 금지하고, 개혁교회에 속한 자녀들은 가톨릭 세례와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것, 프랑스를 떠난 위그노들이 4개월 안에 개혁파 신앙을 철회하고 돌아오면 모든 권한과 재산을 복구해 준다는 약속, 프랑스에 남은 위그노들에게 앞으로 위그노 신앙을 표출하지 않으면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등이었습니다.
위그노들의 반응은 다음 네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망명, 적응, 이중생활, 저항.
(1) 망명 : 루이 14세는 위그노의 프랑스 탈출을 철저히 금지했지만, 대략 17만 명의 위그노들이 해외로 도피하였습니다. 당시 위그노들은 가장 앞선 기술자, 장인들이었기 때문에,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는 앞다투어 위그노를 영입하기 위해 그들의 탈출을 도왔습니다. 그 결과는 매우 놀라웠는데요. 위그노들이 떠난 후 루이 14세 말기 프랑스는 질병과 가난으로 허덕이게 되고, 위그노를 적극 수용한 독일, 영국, 네덜란드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스위스에 정착한 위그노들은 시계산업과 섬유산업을 발전시켰고, 네덜란드는 유럽의 패권을 뒤흔드는 경제강국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의 중추 분야는 섬유산업이었는데, 위그노의 실크제조기술과 직물기술이 그 기반이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금융의 중심이었던 잉글랜드 은행 설립에도 위그노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렇게 변방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 프랑스를 제치고 산업혁명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된 배경에 위그노가 있었습니다.
(2) 적응 : 탈출하지 못한 위그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루이 14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습니다.
(3) 이중생활 : 어떤 이들은 외형적으로는 가톨릭 신앙으로 전향하였지만, 내심으로는 여전히 위그노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낮에는 미사에 참여하고, 자녀들은 가톨릭 교육을 받게 하였지만, 밤에는 성경을 읽고 시편찬송을 부르며 예배하고, 자녀들에게 개혁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일찍이 칼뱅은 이런 방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을 ‘니고데모파’라 부르며, 프랑스를 떠나거나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고백을 분명히 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당시에 이런 이중생활을 하는 위그노들이 사회의 주요 인사들이 되면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뼈아픈 괴로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4) 저항 : 낭트 칙령 폐지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반응은 저항 운동이었습니다. 낭트 칙령의 철회로 전국의 모든 위그노 교회 예배당이 파괴되었고, 겨우 4개의 교회당만이 간신히 파괴를 면하였습니다. 예배당을 잃어버린 위그노들은 전국적으로 비밀집회로 모였는데, 이런 현상은 특히 프랑스 남부에서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소수가 모일 때는 산속 동굴에서, 다수가 모일 때는 광야의 노천에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광야교회”라 불렀습니다. 1688년 님에서 금세공사 매스트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위그노 십자가를 제작하였는데요. 위그노 십자가는 낭트 칙령 철회 이후 박해의 시대를 견뎌내야 하는 위그노들에게 강한 정체성을 심어주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저항과 관련하여 프랑스 개신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은 신앙의 영웅이 있습니다. 바로 마리 뒤랑인데요. 그녀의 오빠 피에르 뒤랑(1700-1732)은 광야교회의 설교자였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위그노 신앙 교육을 받았는데요. 그녀의 집에서 비밀 집회를 열었는데, 이웃집의 고발로 체포됩니다. 어머니는 곧바로 살해당하고, 아버지는 브르스쿠 요새에 투옥되었습니다. 오빠 피에르는 20세의 나이에 탁월한 설교자로 활약하였지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마리는 콩스탕스 감오게 갇히는데요, 그녀의 나이 19살이었습니다. 마리는 콩스탕스 감옥에서 38년 동안 복역하며 다른 여성 수감자들을 말씀으로 위로하고 도왔습니다. 수감 생활 중 마리는 감옥 안에 있는 돌로 된 우물 테두리에 “저항하라”(RESISTER)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는데요. 비진리에 저항하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저항하고, 복음을 위해 저항하라는 메시지로 프랑스 개신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마치면서
‘위그노의 삶과 신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기초로 우리가 교훈받을 것과 좀 더 생각해 볼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 고난 : 위그노의 역사는 혹독한 고난 속에서 신앙을 지켜낸 역사였습니다. 위그노의 고난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었던 것처럼, 박해로 인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위그노들을 통해 개혁신앙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탁월한 기술자들이었던 위그노의 해외 도피는 유럽의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고, 반면 수많은 인재들을 잃어버린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몰락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은혜롭게, 선하게, 공의롭게 나타나는지 보게 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위그노들이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지켜냈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였습니다. 위그노는 자국에서 압제를 당하건, 타국에 피난을 가건, 교회당을 세우고, 세울 수 없으면 동굴과 광야에서라도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시편으로 찬송하며 예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난까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꿋꿋하게 견디며 신앙을 지킨 위그노들에게 신앙이란 말이나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2) 관용 : “관용”(tolérance)이란 말은 종교전쟁이 일어났던 1562년 무렵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 단어는 나의 종교와 ‘다른’ 종교는 ‘틀린’ 종교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용인’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일시적인 허용으로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종교전쟁 시대에 종교의 자유는 용인, 시혜의 대상이었지만,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면 관용은 개인의 자연권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종교의 자유란 내가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고유의 자유, 권리라는 것이지요. 종교개혁과 함께 일어난 종교전쟁으로 유럽은 관용을 배우게 됩니다. 나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인정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지요. 하지만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 종교에 대한 관용은 종교 다원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모든 종교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판단하지 말고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전쟁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염려했던 부분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관용해야 하고, 어디까지 불관용해야 하는 걸까요.
(3) 저항 : 사실 위그노의 입장에서 관용이란 말은 사치처럼 느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위그노들은 철저한 불관용의 원칙 아래 극심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핍박과 고난 속에서 저항하였던 위그노들의 삶에서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 베자의 저항 이론을 통해 우리는 성경적으로 합당한 저항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위그노들은 지위와 재산은 버려도 신앙은 지켰고, 생명을 잃더라도 신앙은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위그노의 저항은 무엇을 잃지 않기 위한 저항이었는지, 무엇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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