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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병철 안

제80문 제10계명에서 명하는 것

최종 수정일: 2022년 10월 24일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3-21)



10계명은 우리 마음의 탐심을 금하는 계명입니다. 탐심은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는 10계명은 우리가 ‘지금 우리의 처지에 대해 만족하고 있느냐’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탐욕은 지금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한 만족하지 못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10계명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처지에 완전히 만족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계명입니다. “제10계명에서 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10계명이 명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처지에 완전히 만족할 거소가, 우리 이웃과 그의 모든 소유에 대하여는 바르고 자애로운 마음씨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만족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참된 만족이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성경이 말하는 만족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 없이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만족하는 것(자기충족)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기 탐욕을 좇아 살다가 좇던 것을 얻게 되었을 때에 만족감을 느낍니다. 오늘 읽은 말씀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가 느끼는 만족이 그런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였습니다. 즉, 자신에게 많은 재물을 허락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는 무관심하면서 창고에 높이 쌓아 둔 자기 재물로 만족한 자 였습니다. 자기 영혼을 향해 외치는 부자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 12:19)

세상 사람들은 이 부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가 만족해하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플렉스(Flex)”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 말은 원래 ‘유연한, 구부러지는’ 이라는 의미의 ‘flexible’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팔을 구부려서 근육을 과시하는 행위를 ‘flexing’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과시하는 단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자신의 부나 귀중품을 과시하는 의미의 속어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SNS에 좋은 자동차나 값 비싼 장신구 사진을 올려놓고 과시하는 행위를 떠올리면 됩니다. 자기 만족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탐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도 그 탐욕이 충족되는 순간에는 만족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만족이란 결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만족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을 말합니다. 하나님 한 분을 인해 만족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데에서 오는 만족,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가 되게 해 주신 데로부터 오는 만족, 성령께서 이 모든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시는 데에서 오는 만족을 말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처지와 관련해서, 우리의 형편이 어떤 것이든지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것을 아는 데에서부터 누리게 되는 만족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만족은 모든 부분에서 전적으로, 또 최고의 수준으로 만족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만족을 누렸던 성도들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주 안에 있는 우리의 만족은 우리의 처지와 형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역경 속에서도 선지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사도는 그가 풍요로울 때나 어려울 때에나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늘 부족함이 없게 하신 사실을 신뢰하였으므로 가난하고 궁핍한 가운데서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만족은 매우 일시적이고 부분적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세상의 재물로 만족함을 얻는데, 그런 것들은 모두 한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돈과 재물로 만족하면서도, 사람들로부터의 인정과 칭찬을 잃어버려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어떤 큰 질병에 걸려 건강을 잃으면 재물로 인해 누리던 그의 만족은 사라지고 맙니다. 또 사람의 탐욕은 끝이 없어서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을 보게 될 때에 그의 만족은 끝이 나고 시기와 열등감 속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자하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죽음 앞에서 그를 만족케 해주었던 소유도, 만족하기 위해 달려왔던 그의 삶도 다 헛된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가 그러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은 재물로 만족하던 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한 분을 인해 만족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무언가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해 아무런 감사 없이 늘 불평과 불만 속에서 탐욕을 좇아 살아가고 계십니까? 만족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만족은 어디로부터 나온 만족입니까?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난 만족입니까? 아니면 탐욕을 채워줄 여러분의 소유로부터 난 만족입니까?

여기 ‘◯◯만 가지면 진정으로 만족(행복)할 텐데’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빈칸에 무엇을 채우고 싶습니까? 예쁜 얼굴, 큰 키, 좋은 친구, 멋진 옷이나 운동화, 최신 핸드폰, 친구들로부터의 인기?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이 빈칸을 채우는 것이 여러분을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갈망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탐욕을 좇아 살아가고 있으며,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마귀와 세상과 거짓된 마음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과 거짓된 마음은 우리가 세상의 무언가를 갖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를 만족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라고 부추깁니다. 그런 삶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플렉스’한 삶이라고 포장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가 만족하고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는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은 헛일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탐욕을 좇아 이 세상의 재물을 추구하여 소유하는 방식으로 만족하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소유를 통해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눅 12:15).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은 소유의 넉넉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과 교제 안에서만이 참된 행복을 누리도록 지은 바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거스틴이라는 교부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오, 주님!…당신에게 찬양을 드릴 때에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는 쉼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 없이 무언가를 추구하여 만족을 얻으려는 우리 시도는 반드시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여러분이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려 하지 않고 다른 데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할 때 반드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탐심을 물리치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심지어 여러분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도 자녀된 여러분이 만족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족을 위해 먼저 우리의 죄를 다루셔야 했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삶과 죽음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의와 생명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 탐욕의 죄,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십니다. 죄인인 우리가 복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로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때 우리는 모든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도 하나님과의 사귐으로부터 얻는 만족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탐하는 자리로 물러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재물을 소유함으로 우리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오늘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은 선하신 하나님께만 참된 기쁨과 만족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만족을 주기를 기뻐하신 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탐욕과 불평과 원망, 시기와 질투, 자기 연민을 버리고 날마다 복되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풍성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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