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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병철 안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삶과 신앙(2)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삶과 신앙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중세 로마 교회의 사제였던 루터가 영혼의 구원의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벌였던 영적인 씨름의 과정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원의 확신의 문제를 두고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나야 했던 루터에게 빛을 가져다 준 것은 다름 아닌 성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과정 속에서 복음을 조금씩 깨달아 가던 루터는 “탑 체험”을 통해 “완전히 다시 태어나 열린 문을 통해 낙원으로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밤낮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에게 값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루터는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을 구원의 근거로 삼게 되었고, 그로 인한 구원의 확신 속에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루터로 하여금 복음을 위해 일하게 만듭니다. 당시 독일 곳곳에서는 면벌부 판매가 횡행하였습니다. 요한 테첼(Johann Tetzel)이라는 사제는 이렇게 말하며 다녔다고 합니다. “주화가 돈궤에 쩔렁 떨어질 때, 영혼은 연옥에서 뛰어오른다.” 또 이런 노래도 유행했습니다. “드럼통 위에 돈을 놓으면, 진주 문이 활짝 열리고 엄마가 들어가신다.” 또 그 시기에 루터가 목회하던 교회의 성도들 중 몇몇이 몰래 면죄부 부흥회에 참여하여 면죄부를 사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루터에게 몇 가지 죄를 지적받고 징계를 받고 있었는데 그들이 회개하고 징계를 받는 대신 면죄부를 사와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히트가 만든 ‘면죄부 지침서’를 얻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신자들의 영혼에 독이 될 만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일로 크게 분노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궁성교회의 문에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고 토론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제시한 95개조의 토론 주제들은 굉장히 과격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반박문의 첫 번째 조항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회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반박문에서 루터는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회개에 대해서 설명한 후, 교황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음을 선언합니다. “교황은 자신의 직권 또는 교회법에 의해 부과된 형벌들 이외에는 그 어떤 형벌도 사할 의지나 권세를 지니고 있지 않다.”(5항) “교황은 스스로 죄를 사할 수 없으며, 단지 죄가 하나님에 의해 사하여졌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확증할 수 있을 따름이다...”(6항) 또 그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에 대해, 로마 가톨릭 교회의 ‘보물 이론’에 대해서 비판합니다. 82항에서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교황은 사랑과 그 영혼들의 최고의 필요를 위해서 연옥에서 모든 영혼들을 해방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루터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를 사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러한 루터의 글은 당시로부터 100년 전에 발명되었던 활판 인쇄 기술을 힘입어 두 주 만에 독일 전역에, 그리고 두 달 만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루터의 주장과 글에 반박하는 소리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519년 6월 27일부터 2주간 라이프치히에서 로마 교회의 학자인 요한 엑크(Johann Mayr Eck, 1486-1543)와 토론합니다. 이 토론의 주제는 권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신앙과 삶의 최종적인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가? 교황인가 성경인가를 두고 엑크와 루터는 설전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자신이 교황이 없어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교황의 뜻과 어긋나는 쪽으로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엑크는 벌컥 화를 내며 “저주받고 역병이나 옮기는” 이단인 존 위클리프와 얀후스와 같은 이단이 다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얀 후스는 성경을 우리 신앙의 유익한 권위라고 주장하다 순교한 신학자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위클리프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는데, 엑크는 루터에게 후스를 버리든지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부인하든지 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때 루터는 토론이 잠시 중단된 사이에 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엑크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토론장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토론을 통해 루터는 교황제도에 대해 더 큰 의문을 품게 되었고, 로마 교황의 권위를 성경보다 높이는 한 로마 교회를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루터는 설교와 강의, 그리고 소책장와 서신을 통해 활동에 박차를 가합니다. 1520년에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책에서 교황만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회의 바벨론 유수”에서는 로마 교회의 7가지 성례를 비판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세례와 성찬, 두 가지 성례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같은 해에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복음을 설명하고 책을 교황에게 헌정합니다. 여기서 루터는 이신칭의를 설명하기 위해 비천한 여자와 결혼한 왕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비록 여자는 사악하고 비천한 여인이지만 왕과 결혼하여 왕비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인 우리가 복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 죄인이지만 동시에 의인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확신 때문에 죄인은 실제로 의롭게 변화됩니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고, 그리하여 “죄와 죽음과 저주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은혜와 생명과 구원은 영혼의 것”이 되게 하십니다.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고 교황에게 헌정한 것은 교황과 화해하고 그를 구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루터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1520년 6월 15일에 교서를 내려 루터의 모든 책을 불태우도록 하였습니다. 그 교서에서 교황은 “루터의 주장 중 41개 항목들이 이단적이며, 망측하고, 오류투성이며, 경건한 귀에는 거슬리는 것으로서 단순한 심령들을 미혹하여 가톨릭 신앙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이 위협을 무시하고 오히려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버립니다. 그러자 1521년 1월 3일에 교황은 다시 교서를 내려 루터를 로마교회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파문장을 공포하였습니다. 이때에 독일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칼 5세입니다. 황제가 된 그는 교황의 환심을 사기 위해 루터로부터 시작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름스에서 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루터는 수 많은 대적자들이 있는 보름스에 가는 것이 많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복음을 불경건한 자들의 조소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회의에 나가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섭니다. 길을 나서면서 루터가 그의 친구이자 동역자인 멜랑히톤에게 한 말은 당시 루터의 심정을 잘 대변해줍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여, 만일 내가 안 돌아오거든, 자네가 가르침을 계속하고 진리에 바로 서 주게. 자네가 살아 있다면 나의죽음은 큰 문제가 아니네.” 또 보름스 근처 뉘른베르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다. 그리고 비록 뉘른베르크에 있는 집들의 기왓장 수만큼이마 많은 마귀들이 있다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모든 지옥의 문과 공중의 권세들의 뜻에 맞서 보름스로 들어갈 것이다.” 그만큼 보름스로 가는 것은 루터에게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가야했던 길이었습니다.

4월 16일 루터 일행은 보름스에 도착하였습니다. 17일 공의회에 나간 루터 앞에는 황제인 칼 5세와 그의 동생 페르디난드, 장차 황제가 될 오스트리아 대공, 7명의 선제후들, 네 명의 추기경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또 여러 귀족들과 관리들, 외국의 대사들이 참석하여 루터를 주시하고 있었고 회의장 바깥에도 수 많은 군중들이 모였습니다. 거기서 루터는 두 가지 질문을 받습니다. 회의 석상의 탁자 위에 놓인 루터의 책들이 루터 자신의 것인지를 묻는 질문과 그 책의 내용을 철회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루터는 그것이 자신의 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두 번째 대답을 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요청하고 하루를 허락받습니다. 하루 동안 생각을 정리한 루터는 다시 황제 앞에 서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따라 확신을 갖게 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교회회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성경적으로 증거가 확실하다고 믿는 저의 책택들 중 그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확실하지도 순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이 회의에서 루터는 이단으로 확정되었고 그는 파문되었습니다. “루터는 이단자다. 그의 책은 모두 불태워져야 한다. 루터는 지금부터 어떤 설교도 해서는 안 되고 책도 써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그를 숨겨주는 사람은 사형을 당한다”는 황제의 파문칙서가 공포되었습니다. 이후 루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회의 직후 루터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보름스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석궁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납치됩니다.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작센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가 보낸 사람들입니다. 루터를 아꼈던 그는 루터가 처한 형편을 알고 미리 루터를 납치된 것처럼 가장하여 바트부르크 성에 숨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루터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융커 외르크(Junker Jorg)”라는 가명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몸도 마음도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었지만, 여러 설교집과 책들을 쓰고,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해냅니다. 이듬해인 1522년에 출판하게 되고 처음 오천 부가 인쇄되었는데 3개월만에 팔릴 정도로 빠르게 보급되었습니다. 이후 1534년에는 구약성경까지 독일어로 번역하여 완역판을 출판했는데, 12년 동안 십만 권이 인쇄되었습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평신도는 물론 수도사들까지도 가까이 할 수 없던 성경이 독일어로 번역되고 보급되어 누구나 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분명하고 순수한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음미하며 이 말씀을 견고히 붙들기”를 바랐던 루터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후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설교와 강의를 통해, 그리고 책들과 서신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루터는 강제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쉽고 분명하게 설교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설복시키는 방식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변화시키게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루터는 로마 교회의 미사를 개혁하고 바른 예배를 가르쳤으며, 또 모든 회중들이 가사를 이해하며 부를 수 있는 여러 찬송을 작곡하기도 했고 대,소요리문답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546년 2월 18일 고향인 아이슬레벤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람들과 저녁을 먹으며 부활하면 서로를 알아볼 것인가를 놓고 대화를 나눈 루터는 가슴의 통증을 느끼고 침상으로 옮겨졌습니다. 거기서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누군가 누워있는 루터에게 “당신은 기꺼이 당신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죽음을 맞이하고 당신이 그의 이름으로 가르쳤던 교리가 옳다고 고백하십니까?”라고 묻자 루터는 분명하게 “예”라고 대답하였고 얼마 후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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