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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Lee Juman

칼뱅의 생애와 사상(3)

칼뱅의 생애와 사상(3) 1540-1555년까지


1541년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오게 되고, 이후 평생을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로 살아갑니다. 1541년부터 칼뱅이 세상을 떠나는 해인 1564년까지의 사역은 1555년을 기점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555년에 비로소 칼뱅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제네바의 행정 장관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제네바의 요청으로 돌아오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555년까지 칼뱅은 온갖 반대와 비난, 공격에 맞서며 제네바 교회의 개혁을 이루어가야 했습니다.


소명을 따라 다시 제네바로

1554년 칼뱅이 취리히에 있는 영국 피난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국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또 다른 측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추방당하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추방은 우리에게 유익할 수도 있다. 추방을 통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셀더하위스, 121).


조국 프랑스를 떠나야 했고, 제네바에서도 추방당한 칼뱅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칼뱅은 또 한 번 나그네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제네바로부터 돌아와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 것입니다.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시간은 너무나도 행복했고 만족스러웠습니다. 반면 제네바에서 겪은 일들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지요. 칼뱅이 동역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그 마음이 잘 나타납니다. 칼뱅은 파렐에게 “나를 매일 천 번이나 죽이는 그 십자가를 지느니, 백 번 죽는 것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비레에게는 “거기에서 고문을 당하느니 영원히 멸망당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네바로 돌아가는 일은 백 번 죽는 것보다, 멸망당하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파렐과 비레는 계속해서 칼뱅에게 제네바로 돌아갈 것을 강권합니다. 존경하는 마르틴 부처도 칼뱅이 제네바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합니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불링거도 같은 뜻을 전했습니다. 스위스 전체의 종교개혁을 생각할 때 제네바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고, 이 일의 적임자가 칼뱅이라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중론이었던 것입니다.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더이상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하여 제네바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1540년 10월 24일 칼뱅은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고백을 합니다. “내 인생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심장을 죽여서 주님께 제물로 바칩니다”(안인섭, 117). 실제로 칼뱅이 자신의 편지에서 사용했다고 알려진 인장에 이 고백이 잘 담겨 있습니다. 한 손에 심장을 들고 누군가에게 건네는 듯한 그림인데요. 훗날 칼뱅의 문장(紋章)으로 불리는 이 그림에 다음과 같은 라틴어 문구가 덧붙여집니다.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그 뜻은 이렇습니다. “나의 마음(심장)을 주님, 당신께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진실로.” 이 고백이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칼뱅의 대답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그저 말과 형상으로만 표현된 것이 아니라 칼뱅의 전생애를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다

1541년 9월 13일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옵니다. 이때 스트라스부르는 제네바에 편지를 보냅니다. 칼뱅이 제네바 교회를 회복하는 일을 완수하면 다시 돌려보내 달라는 내용이었지요. 제네바는 지금 우리에게는 칼뱅이 필요하다고 답신하였습니다. 1538년 제네바를 떠났던 미숙하고 성급한 젊은이는 이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성숙한 목회자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제네바에 돌아온 칼뱅은 한 첫 설교에서 어떤 서운함이나 불만도 표하지 않고, 그저 추방되기 직전까지 강해하던 본문을 이어서 강해하였다고 합니다. 지난 일에 대하여 시비를 가리고 서운함을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이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칼뱅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제네바에 보내시고 강단에 세우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제네바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첫 걸음이었습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제네바 시의회 앞에 선 칼뱅, 개혁주의학술원 홈페이지>


칼뱅이 임종 전 목회자들에게 남긴 고별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스트라스부르에 돌아와서 나는 서둘러 신앙교육서를 만들었는데, 이는 그들이 다음 두 가지 것을 내게 약속하지 않는다면 직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앙교육과 권징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박건택 역, 955). 칼뱅은 제네바에 돌아오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약속받았는데, 첫째는 신앙교육서(교리문답)로 자녀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의 치리권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칼뱅은 이 두 가지를 교회가 바르게 서고 유지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본 것입니다.


1541년 11월 20일 칼뱅이 제출한 “교회 법령”이 의회의 승인을 받습니다. 두 가지 조건에 대한 내용도 이 법령 안에 담겨 있습니다. 신앙교육과 관련해서는, 목사들은 매 주일 정오에 교회 자녀들에게 교리 교육을 성실하고 신중하게 시행해야 하고, 모든 시민들과 주민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주일 정오에 교회로 데려와 신앙교육을 성실하게 받도록 해야 했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들은 만 10세가 되면 교리문답의 내용을 잘 학습하여 3개월마다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문답시험에 통과해야 했고, 교회 앞에서 “신앙교육서에 제시된 바에 따라 신앙을 고백한 후에야 비로소”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안상혁, 20-21).


교회의 치리권과 관련해서, 칼뱅은 성찬이 합당하게 시행되기 위해서 신자들을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치리하는 것은 교회의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에 교회가 치리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제네바 시의회는 교회가 정부의 권한을 침해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정부가 시민들의 도덕적 문제를 상당히 많이 통제하고 간섭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정부의 사법권과 교회의 치리권이 겹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결국 칼뱅의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제네바 치리회(Geneva Consistory)가 조직되었지만 여전히 한계가 많았습니다. 조항의 모호함과 치리회의 구성상, 교회는 치리에 대한 의견을 제안할 뿐 시행은 시의회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1555년까지 시의회는 칼뱅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적대적이었습니다.


장애, 반대, 오해

제네바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장애와 반대 그리고 오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목사들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목사의 자격에 대한 칼뱅의 기준은 높고 엄격하였습니다. 대부분 제네바 출신이었던 목회자들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칼뱅이 바젤의 종교개혁자 미코니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동료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걸림돌이니다. 그들은 무례하고 교만하며 열정도 없고 학식도 부족합니다.” 1541-1546년 사이에 칼뱅은 급진적 목회 개혁을 단행하는데, 이 시기에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칼뱅과 가깝고 교육 수준이 높은 프랑스인들로 교체됩니다(브루스 고든, 243-244).


다음으로 제네바 사람들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날과 크게 다를바 없이 당시에도 사람들은 일, 가정의 필요, 질병 등 무수한 이유로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법령대로 예배가 드려지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칼뱅은 설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설교의 수준과 청중에 대한 기대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러 오기는 합니다. 청중은 예의 바르고 행동도 바릅니다. 그러나 이해와 감정 모두에서 교정이 필요한 면이 많아서, 점차 다루어 가지 않으면 치명적인 염증을 유발할 위험이 있습니다”(브루스 고든, 257).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많은 제네바 사람들은 강단에서 전하는 설교를 듣기 싫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설교자들의 잘못도 있었습니다. 설교자들은 신자들의 삶의 문제를 다루고 교정하고자 하였는데 종종 실명을 거론하며 수치를 주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노르망디 출신의 리샤르 애몬스는 “설교자들은 우리를 모욕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고 불평하기도 하였고, 1547년 아미 페랭(Ami Perrin)은 그의 아내 사이에 있었던 결혼 분쟁 이후 목회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메모를 강단에 남기기도 했습니다(브루스 고든, 258-260).


<칼뱅을 적대하는 리베르탱파, 개혁주의학술원 홈페이지>


이런 문제들은 개혁의 걸림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대와 공격으로 거세게 다가오기도 하였습니다. 제네바가 종교개혁 도시임을 천명하면서 시의회는 사창가를 정리하고 도박과 음주가무를 금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들이 치리회에 자주 올라왔고 사람들의 불만과 비난은 칼뱅에게 집중되곤 했습니다. 모욕죄로 처벌을 받지 않으려고 집에서 기르는 개의 이름을 칼뱅이라고 짓고 모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칼뱅의 엄격한 치리에 반발하였던 사람들 중에 아미 페랭이 수장으로 있는 페랭파가 있었는데요. 이들은 ‘방임파, 자유주의자’ 등으로 번역되는 ‘리베르탱’(Libertine)이라고 불렸습니다. 처음에는 갈등의 문제가 치리의 엄격함에 있다고 보였습니다. 춤 문제 등으로 치리회에 올라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불복하여 갈등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치리의 엄격함이 아니라 치리의 주체에 있었습니다. 페랭파는 자신들을 제네바의 자녀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보기에는 칼뱅을 비롯하여 프랑스에서 온 목회자들이 치리회를 장악하고 제네바를 다스리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미 페랭은 1549년 수석 행정 장관으로 임명되고 1555년까지 제네바에서 권력을 유지합니다. 이들의 반프랑스 정서로 인해 비레는 독살의 위협을 당하고 결국 1555년에 제네바 이주 세력과 동조자들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도주하게 됩니다.


<미카엘 세르베투스>


오늘날까지 칼뱅에게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비난이 있습니다. 칼뱅이 제네바의 독재자였고 피에 굶주린 학살자라는 것인데요. 1553년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 이단자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화형당한 것이 칼뱅의 주도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오해인데요. 16세기 정황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단은 어느 교파, 어느 국가에서든 사형에 해당되었습니다. 모두가 적법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칼뱅은 찬성표를 던졌을 뿐이고, 실제로 그 일을 주도하고 시행한 것은 제네바 시의회였지요. 당시 시의회는 칼뱅에게 가장 적대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더욱이 제네바에서는 세르베투스가 종교 문제로 사형당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식의 집행이 무척 흔했습니다(맥그래스, 213). 칼뱅도 ‘그 시대의 아들’이라 시대적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까지는 가능하겠지만, 세르베투스 화형의 책임을 칼뱅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악의적인 오해입니다.



<칼뱅의 동역자들, 개혁주의학술원 홈페이지>


제네바에 돌아온 칼뱅이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였고, 어떤 장애와 반대에 맞서야 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칼뱅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칼뱅의 힘이 되어준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1548년 10월 데오도르 드 베즈(Theodore de Beze)가 제네바에 도착합니다. 3주 후 베즈는 칼뱅의 주례로 제네바에서 혼인을 합니다. 제네바 사역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일은 좀더 이후의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파렐과 비레에 이어 또 한 명의 좋은 친구요 믿음의 동역자를 칼뱅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동역하며 주님의 교회를 세우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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